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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기 위해 휴경농지에 늘어놓은 건초 더미가 푸른 풀밭과 선명한 대조를 이뤄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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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 (23)
미주리 주 골든 시티의 호스텔에서 이틀을 묵은 것은 폭풍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대평원에서 부는 폭풍은 사납다. 회오리바람으로 번져 집을 뿌리 채 뽑아버린다. 이번 여행에서 어떤 날씨에서도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지만 예외가 있다.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다. 물론 안전한 번개도 있다.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치는 번개가 그렇다. 구름 안에서 치는 번개는 더욱 안전하다. 하지만 번개의 대부분은 공중에서 지상으로 내리찍는다.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무슨 수를 쓰든 피해야 하는데 대평원에서는 피할 곳도 없다. 빗발치는 번개 속에서 자전거 타고 가는 것은 불량배한테 뺨을 내밀며 쳐봐, 쳐봐 하는 것과 같다.
대평원의 폭풍은 사납다
자전거를 타는건 불량배한테 빰을 내미는 꼴
여장을 풀고 로그북(방명록)을 읽었다
오드웨이에선 관신도를 결계하라…
스콧시티에 가면 끝내주는 여자가 있다…
집정보 중 눈에 뛰는 이름, 아! 엘리슨
전문가들은 평원에서 번개를 만나면 자전거에서 떨어져 길가에 무릎 꿇는 자세로 엎드려 있으라고 조언한다. 자세를 낮추고 몸의 표면적을 최소화하라는 뜻이다. 무슬림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듯 그렇게 엎드리고 있으면 번개가 미안해서라도 살짝 피해갈 것 같다. 문제는 번개가 한두 번 치고 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두 시간 이상 생생한 음향 효과와 함께 불꽃 쇼를 벌인다는 점이다. 다리가 저려오면서 ‘신앙심’에 회의가 생겨 무릎 꿇고 계속 있기 보다 자전거 타고 가서 10m라도 거리를 줄이고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모처럼 세탁 내몸에서 향이…
나는 아직 길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맞은 적이 없다. 이번에도 호스텔에 있는 동안 폭풍이 왔다. 이 호스텔은 돌로 지은 주택이어서 안전하다 못해 갑갑하다. 완벽히 돌로만 외벽을 처리한 집에서는 처음 자본다. 통나무집보다 더 습한 느낌이다. 빈집이었는데 어느 날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빌려주기 시작하면서 호스텔로 발전했다.
이 호스텔을 혼자 썼다. 여느 가정처럼 살림살이가 없는 게 없다.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 모처럼 사이클복과 농구복을 다 세탁했다. 짐을 대처분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청결에 대한 기대치가 꾸준히 낮아진다. 다른 말로 해서 계속 더러워진다. 여행 처음에는 라이딩이 끝나면 전날 세탁한 옷으로 산뜻하게 갈아입곤 했다. 옷 가짓수가 많아서 한번 빨면 여러 날을 계속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지금은 하루 라이딩이 끝나면 백넘버 18번의 농구복으로 갈아입고 사이클복을 빤다. 다음날에는 사이클복을 입은 채로 생활하고 농구복을 빤다. 때로는 너무 늦게 도착해서 빨래를 전혀 못하고 땀 찬 옷들을 입고 지낸다. 그래도 괜찮다. 괴로워할 주위 사람들도 없다. 그러다가 이렇게 하루 종일 세탁 향이 나는 옷을 입고 지내면 마치 내 몸에서 향이 나는 것 같다.
밖에서 사나운 바람이 부는 동안 돌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침대 베개 두 개를 등에 받치고 누워 로그북(Logbook)을 읽는다. 라디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방명록 격인 로그북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기록은 같이 여행하지는 않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익히는 다방과 같은 곳이다. 동진, 서진하는 사람들이 길과 숙박지에 대한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게시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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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농촌은 쇠락하고 있다. 사진은 미주리 주 에버튼에 있는 건물. 은행과 작은 호텔이 있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심하게 훼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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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온 마크 부처(Mark Butcher)라는 이는 “콜로라도 오드웨이(Ordway)에 가면 종교에 미친 사람을 경계하라”면서 인상착의를 남겨 놓았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키 작은 남자로 나이는 60살 가량. 자신이 선택된 사람이라며 두 시간 동안 붙잡고 늘어진다고 한다. 나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척하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 내 연기가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것 같지 않다. 언젠가 미국 거지가 구걸하기 앞서 나한테 “영어 할 줄 아느냐”고 물어서 “노 잉글리쉬”라고 하니까 순순히 물러섰다. 손만 내밀어도 충분히 구걸하는 의사표시가 되는데 왜 굳이 내 영어청취력을 확인하려고 했을까.
미혼 남성 라이더들에게 전하는 특별메시지도 있다. 캔자스 주 스콧 시티(Scott City)에 가면 체육관에서 묵을 수 있는데 기포가 뽀글뽀글 나오는 열탕인 자쿠지(Jacuzzi) 딸린 수영장이 있고 무엇보다 ‘끝내주는 여자’(a hot girl)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히 스콧 시티에서 하룻밤 묵는 것으로 일정들을 조정하는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나도 웬만하면 거길 들러봐야지. 핫걸이라.
여행 초반 크리스쳔스버그 가는 길에 만난 션 젠슨은 이미 일주일 전 이곳을 다녀갔다. 더스틴 들레이니(Dustin Delaney)라는 사람은 고정식 기어 1단짜리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엿새 동안 960㎞를 소화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 영국에서 온 두 마크를 만났던 모양인지, “두 마크, 빨리 좇아와”라고 약 올리는 글을 써놓았고, “자전거 짐칸에 불꽃놀이 폭죽을 장착했는데 맞바람이 부는 캔자스가 보이면 떠뜨리겠다”고 썼다. 멋있어 보일 것 같은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은 안 됐다.
“사랑이 전염병이길” 소망한 그
체스터에서 만난 메노나이트 목사 부부 일행은 바로 하루 전에 지나갔다. 잘하면 이 팀은 따라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53살이라고 나이를 밝히면서 이번 여행이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일 들 중의 하나라고 적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애덤 왕(Adam Wang)은 “신이여 아메리카를 축복하소서(God Bless America)”라는 상투적인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캔터키 주 매리온 마을 도서관에 쪽지를 남기고 먼저 떠난 앨리슨의 종적을 확인했다. 그는 문장을 직선이 아니라 원형으로 늘어놓는 특유의 인사법을 통해 “사랑이 전염병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날짜를 보니 닷새 전 여기에 묵었다. 열흘 전에 헤어졌으니 나보다 두 배나 빨리 여행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를 혹시 따라잡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무망한 일이었던가. 좀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냉장고에 그가 붙여놓은 쪽지를 발견했다. 꼭 유서 같다.
바라는 것(Desiderata)
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정적에 싸인 곳을 기억하기를. 가능한 한 굴복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당신의 진실을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기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아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이기를.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니. 사납고 나쁜 사람들을 피하기를. 그들은 영혼을 갉아 먹으니.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공허해지거나 잠시 기분이 나아질 뿐. 세상에는 항상 당신보다 낫거나 못한 사람들이 있거늘. 앞일을 계획하는 것만큼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을 음미하길.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도 그것이 당신이 할 일이라면 그 일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시간에 따라 운은 변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하지 않는 당신의 천직이 될 것이니. 사업을 할 때는 조심하기를. 세상에는 사기가 판치고 있으니. 그러나 이것 때문에 좋은 일들에 대해 눈감는 일이 없기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분투하고 있고 영웅적인 노력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으니. 당신 자신이 되기를.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지 말기를.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지 말기를. 아무리 무미건조하고 정나미가 떨어지는 일들이 벌어져도 사랑이야말로 잔디처럼 연중 끊이지 않는 것이니.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단념하면서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기를. 갑작스런 재난에서도 당신을 지켜줄 영혼의 힘을 키우기를. 그러나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기를. 두려움의 대부분은 피로와 외로움에서 싹트나니. 엄격한 자기수양을 넘어서 자신에게 온화하기를. 당신은 우주의 자녀이니. 나무와 별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니. 당신은 여기에 있을 권리가 있거늘. 그리고 당신이 의식하든 못하든, 우주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으니. 그러므로 신과 융화하길. 신이 당신에게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리고 삶의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 당신이 무엇을 열망하고 무엇을 위해 다투고 있든 간에 당신의 영혼과 조화를 이루길. 세상은 거짓과 허영과 무너진 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답거늘. 조심하기를. 행복하기 위해 분투하길.
이 글을 읽으면서 그를 좀 더 이해하게 됐다. 그와 만날 기회가 없다고 해도 그리 섭섭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얘기를 나눈 듯한 느낌이다. 맘에 와 닿는 구절은 ‘굴복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이라는 대목이다. 우리는 생각이 다르면 원수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생각이 좁아지고 더욱 말을 나눌 사람들이 적어진다. 때로는 그게 싫어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남한테 맞춰나간다. 그의 메시지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납고 나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기 앞서 피하라는 말도 좋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미워서 하면서 닮아간다.
사납고 나쁜사람은 피하라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는 말도 내게는 적절한 충고였다.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이 끝난 뒤 뭘 할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가족도 있는데 이대로 백수로 지낼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그 일이 과연 만족스러울지…. 어느것 하나 여행하는 동안에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현재의 고민이 없으면 미래의 고민을 끌어다가 한다고 한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앨리슨은 상상의 것들로 괴롭히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래, 여행하는 동안에는 여행에만 충실하자.
엘리슨이 남긴 쪽지 ‘상상의 것으로 스스로 괴롭히지 말라’
그래, 여행에 충실하자 여행이 끝난 뒤 뭘 할까 어지러운 생각을 접어두기로 했다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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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의 저자 hongdongz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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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시티에 대해 마지막으로 언급할 만한 것은 쿠키스(Cooky’s)라는 식당. 이 식당 파이의 맛이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에서 최고라는 평이다. 레몬 파이를 먹었는데 평판대로였다.
폭풍은 지나갔고 이제 다시 출발할 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분히 안식을 취했다. 동쪽으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미풍이 남아 있었지만 한 파도가 지나가고 난 뒤의 소강상태다. 다음 파도가 올 때까지 어서 잔잔한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 그렇게 페달을 밟았고 파죽지세로 캔자스를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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