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27 17:13
수정 : 2005.10.28 14:30
역사로 보는 한주
1963년 11월1~2일 이틀간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에서 두옹반민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 딘 디엠 대통령과 그의 친동생으로 대통령 고문이자 비밀경찰 및 특수부대 총수였던 응오 딘 누 일족이 살해당했다. 1954년 5월 프랑스 식민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 인민군에 참패한 뒤 등장한 디엠 정권의 절대적 후원자 미국은 이를 묵인·지지했으며, 그 다음해인 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뒤 ‘베트남 수렁’에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중부 베트남의 고도 후에의 귀족 출신인 디엠은 프랑스 반대운동 경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디엔비엔푸 함락 뒤 미국에서 귀국했다. 디엠은 미국의 강력한 후원 아래 프랑스 괴뢰정권 수반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55년 10월 베트남공화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집안은 가톨릭 우대정책으로 민족주의적인 불교도들의 반발을 샀으며 63년에는 계엄령까지 선포해 사찰을 공격하고 반발하는 승려들을 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디엠은 동생 누에게 실권을 안겼다. 무능과 부패, 정통성 부재 속에 승려 분신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반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케네디 정부는 그의 일족을 제거하는 쪽으로 나아갔고 헨리 캐버트 롯지 남베트남 주재 미국대사는 쿠데타 세력의 모의사실을 알고도 방조했다.
미국은 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수립을 선포한 호치민의 민족주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이미 50-54년 기간에만 프랑스에 40억달러를 지원했다. 61년에 남베트남은 미국의 대외원조 수혜국 가운데 제5위를 차지할 정도로 미국에 기대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참패 직전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 측근들은 소규모 핵무기 사용까지 건의했으나 영국 등이 함께 가담하지 않는 미군 단독개입에 부정적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국은 앞서 한국전쟁 때도 미국의 원폭사용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군사고문단 수준이 아닌 미 지상군의 전면 개입은 64년 통킹만사건 조작 이후에야 이뤄졌다.
프랑스군 2200여명이 죽고 1만여명이 투항한 디엔비엔푸 전투 뒤 이뤄진 제네바합의는 정전을 실시하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잠정 분단해서 모든 외부개입을 금지한 상태에서 56년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미국은 이를 지키지 않았고 베트남 분단은 고착됐다. 공산 중국을 봉쇄하고, 필리핀과 말레이반도 등 동남아지역의 사회주의의화 도미노를 막고, 동아시아 냉전의 보루 일본의 안정을 위한 원료 및 소비시장 확보를 위해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는 잃어서는 안될 근거지였던 것이다. 냉전적 시각과 자국 이기주의에 빠진 패권국가 미국의 그런 욕심이 디엠 일족과 수백만명이 희생당한 베트남의 비극을 불렀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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