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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7 18:23 수정 : 2005.10.28 14:28

전쟁과 기억
김경학 외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 2만2000원

빨갱이 가족 딱지 때려 여성들은 개가에 나서야 했다 공식적인 전쟁 기록이 외면한 학살 사연과 연좌제의 고통 등 민중의 아픈 기억 구술사적 접근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그럴 만하지 않은 것은 잊는 게 인지상정이다. 국가 혹은 이데올로기가 만든 폭력인 전쟁에 이르면 그 사정이 어떠할까. 크게는 갈린 남북이, 작게는 한마을이 편을 갈라 서로 죽이고 죽게 만든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상처입은 사람들의 머리에는 무엇이, 어떻게, 왜 기억되어 있을까. <전쟁과 기억>(한울아카데미 펴냄)은 국가적 기억에서 소외된, 그래서 오히려 생생한 주변부의 전쟁기억을 환기한다.

낮엔 경찰 밤엔 밤손님 세상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축장마을, 장동마을

한국전쟁 동안 김해 김씨 씨족마을인 장동마을은 14가구 80여명이 좌익에 의해 학살된 반면, 각성바지인 이웃 축장마을에서는 희생자가 단 한명이었다.

“누구 하나 거시기 않고 그 양반이 선을 베풀어 가꼬 당시에는 거시기로 해서 살상한 사람이 없거든.”

마을사람들에게 사건에 관련된 구체적인 인물과 활동내역은 기억되지 않고 학살당한 집단과 개인에 대한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들이 기억하는 것은 학살의 주체로 공산군, 빨갱이놈, 유격대, 인민위원회, 당위원회 등 불특정 집단이다. 생사여탈권을 쥔 거물급 좌익들에 대한 기억은 구체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학살하라고 지시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기억해 봤자 득될 게 없는 이웃동네이기 때문. 피치못할 사정으로 공동체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이야기된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학살의 주체보다는 학살당한 사람들을 향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기억은 족보, 묘지, 제삿날, 순교비, 폐가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1구 남송리, 입석리

“원망해서 뭐 하거시요. 어따 하소연할 떼도 없는디. 내 사주가 거슥한께 이 고생을 한갑다 그랬어요.”

산악지대 초입, 반란군-진압군의 전투가 벌어진 전장에 위치해 낮에는 경찰 밤에는 밤손님의 세상이었다. 구술자는 듣는이에게 이런 것들을 이해 못할 것이라고 전제하여 구술하면 할수록 경험의 의미가 파편화한다. 자기 땅에서 피난민이 된 사람들. 주민들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거시기한 존재’로 취급되는데 이마저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 지역의 대표자들이 전유하는 공식적 기억과 산발적이고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신체화한 기억으로 나타나는 고립된 기억이 혼재한다.

# 전남 강진군 ㅅ마을

전쟁중에 남편이 희생된 여성들. 가족이나 남편이 왜 끌려가야 했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남정네가 하는 일로부터 격절된 탓에 빨갱이나 보도연맹이 무엇인지 몰랐고 경찰도 이들에게는 무서운 존재일 따름이었다. 결과로서 빚어진 연좌제 등으로 억울함과 원통함을 표현하지 못한 채 한으로만 간직해 왔다.

호적에 찍힌 낙인 운명으로 생각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했다 귀순한 반란군이 체험한 바를 군인들 앞에서 증언하고 있다. (전남 보성1949년 1월) 자료출처 ‘격동기의 현장’
“무엇을 하고 싶어도 호적에 낙인 찍혀졌기 때문에 ‘나는 안돼’ 하는 생각에 시작도 못한 일이 많다.” 그들은 반공체제에 순응해갔고 학살에 대해 말해준 대상도 들어줄 대상도 없이 단절된 채 여생을 살아왔다. 구술자 대부분은 학살의 책임을 시대를 잘못 태어난 탓이거나 자신의 팔자소관으로 돌린다. “어쩔 것이요, 고생 많이 하게 태어난 운명을, 도망갈 생각은 해 본적도 없어.” 허무의식마저 내재돼 있다. 이들은 빈곤의 악순환에 얽혀 생활보호대상자가 되는 등 힘들게 살아왔다. 그런 탓에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은 단절되어 있다.

# 여순사건

“즉결처분도 없어요. 그냥 죽여불면 그걸로 끝이여. 뭐 누가 알아볼 사람이 있간디.”

반란군의 일시적 폭력에 비해 진압군 쪽의 폭력은 지속적이고 장기간에 걸쳐 이뤄졌다. 반란가담자 또는 부역자로 몰린 개인과 그 가족은 ‘연좌제’라는 국가·사회적 폭력을 당했다. 자수하고 나서도 항상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한테 죽임을 당했는가가 죽은 자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이후 가족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의 개가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죽은 자와의 관계를 해소하는 몸부림. 최근 들어 긴 입막음 끝에 논의가 일고 있는 위령비는 죽은 자보다는 산자를 위한 것. 그렇게 함으로써 산자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비공식적 기억을 공식적 기억의 영역으로 끌어내게 된다. 또 유족회 활동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의 자발적 결사체로 일종의 ‘유사친족’ 성격을 띤다.

“즉결처분도 없어 죽어불면 끝”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교회와 염산교회

야월교회는 교인 65명 전원이 좌익에 의해 피살되고 염산교회는 3분의 2인 77명이 학살됐다. 군경과 유엔군을 구세주로 알고 환영하다가 교회당에 감금돼 비인간적인 공산당들이 지른 불에 타죽어 순교했다는 게 공식기록. 그러나 밤에 끌려나와 죽임을 당했고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친이승만 세력으로 간주된 그들이 조직과 정보망을 가진 탓에 좌익입장에서는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 인천상륙으로 퇴로가 끊긴 좌익이 몰려들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수복이 늦어졌기 때문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밖에 없었기 때문.

두 교회에 세워진 순교비는 일종의 기억장치. 반공이데올로기를 굳히고 침체에 빠진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지순례코스로 지정됨으로써 교인 및 순례객이 많아져 지자체의 관광사업 활성화 의도와 딱 맞아떨어졌다.

거시기한 것에서 거시기함을 벗겨내거나 거시기한 것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새롭게 자리매김하려는 젊은 연구자들의 이번 노력은 <전쟁과 사람들: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 연구>(2003)에 이은 두번째 묶음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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