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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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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정자에 자리잡은 말벌집 떼내려 119에 연락했더니 사정없이 ‘에프킬러’를 쏘라고 조언한다 살충제를 쏴대는 것은 아름다운 구조물과 벌들에게 할 짓이 아닌데… 결국 그물쓰고 군사작전 벌이듯 떼어냈다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농부도 아닌 것’이 자꾸만 시골살이 이야기하는 데 대한 반감이 없지 않다는 것을 느끼곤 있지만, 방금 전에 딴 말벌집 이야기는 혼자 묻어두기 힘들다. 말벌집이 마당의 정자 천장 한복판에 자리잡은 것은 금년 봄께였다. 부득불 정자라고 했지만 방부목(防腐木)을 썩썩 썰어 너댓 시간만에 뚝딱 지어 마당 끝에 세운 것이다. 작은 평상에 지붕이나 하나 얹혀놓은 정도라 왠지 사대부 냄새 나는 ‘정자’나 ‘야정(野亭)’이란 말은 분에 넘친다. 말벌을 마당에 들이고 그들의 놀라운 건축술마저 허락하게 된 것은 순전히 여름철의 풀 때문이었다. 릴케가 “위대했다”고 노래한 유럽의 여름은 잘 모르겠지만, 어김없이 풀들을 키운 우리 산하의 여름철도 참으로 위대했다. 끔찍하게도 배타적으로 사랑받는 작물의 위태롭고 더딘 성장과 달리 황대권씨가 ‘야초(野草)’라 부르고 윤구병선생이 ‘잡초는 없다’라고 말하는 잡풀들은 정말 무서운 생명력을 발휘했다. 그 기세를 욱일승천의 기세라 해도 괜찮을까. 어떤 이는 풀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낸다지만, 내 경우에는 그 경지에 미달되어 어쩔 수 없이 여름 내내 낫과 호미를 들고 맹렬하게 풀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애당초 난공불락의 싸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김을 메고 돌아다보면 다시 새 풀이 돋아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한번은 마당의 반 이상을 점령해 들어오는 풀을 베다가 그 녹색의 열기에 그만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는데, 그것은 거의 공포의 감정과 비슷했다. 감당할 수 없는 풀의 무서운 기세는 단지 무섭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여름철 대지는 그런 풀의 열정을 부추기듯 뜨겁게 이글거리곤 했다. 나중에는 결국 풀의 기세에 겸손한 마음으로 굴복했다. 그러자 밭은 물론이고 마당의 절반이 세상 만났다는 듯이 풀로 덮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정자의 말벌집은 커다란 세숫대야만하게 천천히 부풀어올랐다. 말벌이 여름 내내 벌판에서 물어와 침을 섞어 지은 외피의 재료는 놀랍게도 펄프인데, 수천 가닥의 주름은 뇌의 겉모양과 같았다. 때로 연한 회색으로도 보였고, 낡은 한지 빛깔로도 보였다. 말벌에게 신경을 쓰다보니, 놈들이 꿀을 빼앗기 위해 하루에 허리를 동강내는 꿀벌이 몇 백마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 여름에 꿀벌을 보기 힘들었을까. 공부를 하다 보니 여왕벌 혼자 그 아름답고 웅장하고 정교한 집을 짓는다는 기록도 얼핏 보였다. 문제는 임부의 배처럼 급속히 커져 가는 크기였다. 놈들의 생태야 어찌됐든, ‘왕퉁이’나 ‘오랑캐벌’로 불리듯 그 사나운 기세가 정자 주변에 늘 긴장감을 자아냈다. 자연 그쪽으로 발길을 자제하게 되자 정자에 이르는 널찍한 공간은 순식간에 풀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마음놓고 자란 풀들의 머리 위로는 칡덩굴이 춤을 추듯 너울거리며 자주빛 꽃을 피우기도 했다. 이윽고 기온이 떨어지자 풀숲에서는 돌연 뱀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백반을 뿌렸지만 고추농사를 망친 잦은 비 때문에 효험이 없었는지 한번 띈 뱀들은 자꾸만 나타나 사람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금년 여름에 남의 집에 내습한 말벌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러잖아도 게으른 사람인데 풀베기를 포기하게 만들었고, 결국 무성한 풀숲은 만나고 싶지 않은 뱀까지 불러들인 것이다. 그런 적대적인 분석과는 아랑곳없이 말벌집은 자꾸만 부풀어올라 나중에는 한아름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길이 또한 정자 허공의 거의 반을 차지했다. 솔직히 말해 겁나는 크기였지만 그 둥그런 구조물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거기까지는 좋았다. 지난 주였다. 별 생각없이 밭가의 거름더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갔다가 그만 말벌에게 손등을 쏘였다. 불똥이 닿은 것처럼 매섭게 뜨거웠고, 이내 손등은 부풀어올랐다. 암모니아가 좋다길래 깊은 밤, 부어오른 손등에 뜨뜻한 오줌을 적시면서 나는 아무래도 말벌과의 이 불안한 동거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왕 결심한 김에 더 추워지기 전에 말벌집을 떼내고 정자의 위치를 옮기기로 작정했다. 대문 옆의 개집 위치로 정자를 들어 옮기고, 개집을 다시 정자 위치에 지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내년 여름에 정자를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주변에서 말벌에 쏘이면 죽을 수도 있다며 하도 근심스레 말리기에 119에 연락했더니, “우리도 전문가 아니다. 사정없이 ‘에프킬라’를 쏘라”고 조언할 뿐 달려오지는 않았는데, 살충제를 쏴대는 일은 그 아름다운 건축물과, 여왕벌이 겨울 오기 전에 다 물어죽인다곤 하지만 벌들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침 ‘풀꽃운동’이 태동된 지소 앞 자두나무집에 놀러온 지인이 있어, 그와 함께 양파를 담았던 뻘건 비닐그물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젊은 날부터 즐겨 입던 야전파커로 온몸을 꽁꽁 여미고, 해 떨어지자 정자 안으로 마치 군사작전을 감행하듯 기습했다. 말벌집을 밑에서부터 커다란 포대로 잽싸게 감싸고 전광석화처럼 천장에서 비틀어 떼냈다. 말벌에 물려 죽는 사람이 일본에서는 한해에 서른 명이 넘고, 이 나라도 한해 대여섯 명 가량은 벌에 쏘여 죽는다는데, 금년치 통계에 우리 목숨도 보태질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우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놀란 것은 자다가 깬 병정벌들도 마찬가지였다. 침입자를 물긴 물어야 하겠는데 어디를 물어야 할지 몰라 윙윙대기만 할 뿐 놈들은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뗀 벌집을 포대에 담아 우물가로 신속하게 옮기고, 담요로 덮었다. 집안에 들어와서야 머리에 뒤집어썼던 양파그물을 걷어내고 마당을 내다보았더니, 졸지에 거처를 빼앗긴 놀란 벌들 수백 마리가 분통하다는 듯이 마당에서 윙윙거리는데, 마침 앞산에 잠겨 있던 보름달이 휘엉청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위쪽에서 돈벌이판을 벌인 사람들이 2차선으로 길을 넓혀 달라고 민원을 넣었다는 우울한 소리가 들린다. 길이 넓어지고 차들이 늘어나면 말벌과 싸우던 오늘밤의 ‘말벌집 퇴치작전’도 그립지만 아득한 추억이 될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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