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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18:29 수정 : 2005.11.04 15:58

역사로 보는 한주

일본 고이즈미 정권의 새 외상이 된 아소 다로, 관방장관이 된 아베 신조와 같은 극우파들, 그리고 그들을 요직에 앉힌 총리와 자민당 지도부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원형을 확인하고 싶다면 약간만 과거로 돌아가 보면 된다.

1943년 11월5~6일 이틀간 도쿄에서 ‘대동아회의’가 열려 ‘대동아공동선언(대동아선언)’이 채택됐다. 주요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다. 일본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 중화민국(난징) 국민정부 행정원장 왕조명, 만주국 국무총리대신 장경혜, 필리핀 대통령 호세 라우렐, 버마(미얀마) 내각총리대신 바 모. 조선과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 등은 본디 ‘대일본제국’ 영토이므로 타민족 대표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나마 빠졌다. 한마디로 군국주의 일본과 동아시아 및 남태평양의 일제 식민지 또는 점령지 괴뢰정부 대표들 모임이었다.

이때 채택된 대동아선언은 미국·영국이 동아시아 국가들을 억압하고 침략·착취하고 예속시켰다고 비난하면서 대동아 각국이 합심해서 미·영의 질곡에서 해방되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하자는 내용이 그 골짜였다. 이는 1941년에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전후 세계구상을 밝힌 ‘대서양헌장’을 모방하고 또 거기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서양헌장은 미국 영국은 영토확장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영토를 변경할 때는 관계국 인민의 의사를 존중하겠고, 정부형태도 선택할 권리를 주겠다는 따위의 8개항을 담고 있었다. 일본이나 독일 지배를 받는 민족들의 저항을 촉발하는 한편 변형된 형태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전략이었다.

이 황당한 대동아선언에 대해 일본에서는 아직도 미련이 많다. “이 회의는 사상 첫 유색인종들만의 회의로 그 역사적 평가가 높다”거니, “선의로 해석하면 대동아공영권의 목적은 아시아 각국을 열강의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시켜, EU(유럽연합)와 같은 대등한 국가연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게 실현됐다면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거니 하는 게 다 그런 것이다. 또 “일본군이 (구미)종주국세력을 배제한 것이 결과적으로 (아시아국가들의) 독립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나 일본군 통치하에서 근대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구종주국(구미)에 비하면 일본이 더 나은 통치자였다는 평가도 있다”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들은 여전히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강도들로부터 장물과 인질을 빼앗은 강도는 강도가 아니라는 저급하고 유치한 논리를 여지껏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소 다로와 아베 신조류의 인간들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극우신념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일련의 ‘망언’들로 그것을 입증했다. 그들이 자신들도 한몫 챙기려고 뒤늦게 약탈난장판에 뛰어든 더 조잡한 제국주의자들의 후예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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