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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21:58 수정 : 2005.11.04 15:53

지난해 5월 세계 최대 규모의 한의학 대학으로 거론되는 중국 상하이 중의약대 교정 한복판에 세워진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 동상. 중국 의학계에서 <동의보감>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한 단면이다. 상하이/연합뉴스

국내판은 물론 중국판·일본판 수십본 동아시아 의학 표준으로 우뚝 병 치료 중심 의학을 몸과 예방 중심으로 바꿨다 허준은 단순한 의사 넘어선 자연철학자

의학속 사상/④ 의학의 집대성(동아시아): ‘동의보감’

“우리나라 서적으로서 중국에 들어가 출판한 것이 매우 드무나 홀로 <동의보감> 25권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그 판본이 아주 정묘하였다. 내 집에는 이 책이 없어 매양 우환이 있을 때는 이웃 사방으로 빌리고는 했더니 금번에 이 책을 보자 꼭 사고 싶었으나 말굽은 닷 냥을 변통하기 어려워 하염없이 돌아온다.” 1780년 연암 박지원은 자신의 중국견문기인 <열하일기>에다 이렇게 적었다.

연암이 본 것은 <동의보감>의 중국판 초간본(1768년)이었다. 이 책의 발간 동기에 대해 능어라는 중국학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은 조선의 허준이 쓴 것이다. 그가 외딴 외국 사람이지만, 학문의 이치란 땅이 멀다고 해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의보감>은 이미 황제께 바쳐져 일국 최고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여태까지 비각에 간직된 채로 있어 세상 사람이 엿보기 어렵다. 천하의 보배는 마땅히 천하가 함께 가져야 할 것이다.” 1613년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이 책은 중국 사신이 꼭 챙겨가야 할 조선의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차츰 명성이 중국에 알려져 급기야 중국판이 나왔는데, 연암이 본 것이 그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보다 50년 정도 앞서 1723년에 첫 출간이 있었다.

현대의 서지학적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동의보감>은 무려 30여 차례 인쇄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에서는 두 차례 인쇄되었다. 국내에서는 조선시대에만 대여섯 차례, 현재까지 십여 차례 공식 출간되었다. 필사본이나 요약본까지 합친다면 그 수요는 엄청났다.

중국에서 첫 출간 이후 평균 10년마다 한 번씩 출간되었다니! 과연 조선의 서적으로 외국에서 이만큼 자주 발간된 책이 <동의보감>말고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중국 의서 중에는 이만큼 자주 찍힌 책이 널려 있다고? 천만의 말씀, <중국의적통고>(1996)라는 책은 중국 고대 의서의 판본을 거의 빠짐없이 조사해놓았는데, 기초 서적이 아닌 임상의서 수천 여종 가운데 <동의보감>보다 자주 찍힌 것은 불과 대여섯 종에 불과하다.

중국 황제에게 바친 책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의보감>이 이웃 나라에서 그토록 인기가 있었던 것일까? 1743년 중국의 왕여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글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의학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의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허준 선생이 편집한 책인 <동의보감>을 얻었다. 그 책의 약물성미를 본다면 상세한 병세와 병증에 따라 변증하여 방제를 정했고, 또 그 도리를 밝혔는데 그야말로 의서의 대작이었다.” 곧 의학의 전체 내용을 조리 있게 정리했다는 것이 그의 소감이었다. 일본에서는 이 책이 쇼군의 명으로 편찬되었는데, <동의보감>으로 의학의 표준으로 삼겠다는 것이 편찬의 동기였다.

“환자들이 책을 펴서 눈으로 보기만 한다면 허실, 경중, 길흉, 사생의 징조가 맑은 물거울에 비추인 것처럼 확연히 드러나도록 하였으니, 잘못 치료하여 요절하는 근심이 없기를 바라노라.”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의 대원칙을 이와 같이 밝혔다. 이는 모든 병의 원인, 증상, 예후 판단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으로 의사와 환자 모두 간절히 소망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자. 병과 증은 수백, 수천 가지가 되며, 약재와 처방은 수천, 수만가지가 된다. 병을 읽어내는 진찰법이나 침구법도 수십, 수백 가지 방법이 있다. 고대의 의학 서적에서부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당대의 저작까지 수백 종 수천 권이 이런 내용을 다투어서 담고 있었다. 특히 금원시대 네 명의 대가 이후 더욱 많은 의학 유파가 생겨나서 자신의 의학을 진리라고 외쳐대고, 무수한 처방이 난무하게 되었다. 이토록 허준이 구성해내야 할 내용은 방대했으며 복잡했다. 이런 내용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중국판(왼쪽)과 일본판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동아시아의학이라는 큰 산악을 올라가는 지도로 비유할 수 있다. 산에 난 모든 생로를 표시하여 산에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한 것이 허준의 작업이었다. 그는 여러 선현이 앞서 그린 내용을 바탕으로 삼고, 게다가 자신이 의학의 길을 밟으면서 얻은 경험과 정보를 종합하여 전인미답의 새 지도를 그렸다. 그는 갈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정했고, 기존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았고, 몰랐던 길을 새로 내며, 샛길과 큰길을 잇는 작업을 해냈다. 허준은 의학을 창시했다는 황제 이후 17세기에 이르는 동아시아 의학의 역정 전부를 대상으로 삼아 방대하면서도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냈다. 한마디로 말해 의학의 표준을 세운 것이다.

<동의보감>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병 치료 중심의 의학을 몸 중심의 의학으로 바꾸었다는 점이다. 허준은 몸의 건강과 병의 예방을 병 치료에 앞서는 것으로 위치지웠다. 이런 원칙은 의학의 경전 <황제내경>이 제시한 것으로 후대 의가가 금과옥조로 삼은 것이지만, 막상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의학 전반을 솜씨 좋게 정리한 것은 드물었다. 그 가운데 허준의 작업이 단연 발군이었다. 허준은 정·기·신, 오장육부 등 생명과 신체의 원리에 관한 부분을 ‘내경’ 편으로 삼고, 머리·얼굴·사지 등 몸 겉 부위를 ‘외형’ 편으로 삼았다. 또 병론 일반과 각 질병별 각론을 ‘잡병’ 편으로 삼고, 이에다 약물이론과 치료법을 다룬 ‘탕액’ 편과 침구이론과 치료법을 담은 ‘침구’ 편을 덧붙였다.

어떻게 이런 의서가 17세기 조선에서 출현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조선의 사상, 문화적 풍토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본격적인 유교 국가를 표방했으며, 16세기 중엽에는 중국 송대의 성리학 논의를 넘어서는 경지에 도달했다. 건국 초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의 실천으로서 의학의 총정리 작업을 시도했다. 세종대 조선산 약재를 위주로 한 의학을 <향약집성방>, 중국과 한국의 모든 의서를 모아 정리한 방대한 <의방유취>가 그 성과였다.

조선 사상·문화가 토대

이 가운데 <의방유취>는 매우 중요하다. 허준은 이렇게 정리해 놓은 책자를 통해 의학의 전체 범위와 각 의가의 논의의 같음과 다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리학의 심화와 함께 성리학자들에게 마음의 수련이 매우 중시되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사회에서는 양생의 철학과 기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허준은 의학과 양생 전반을 하나로 꿰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허준은 단순히 병만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뛰어난 자연철학자 또는 사상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의보감>의 세계성이 그 수준에서 비롯한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심장하다. <동의보감>은 겨우 조선의 독특한 의학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허준은 동아시아 의학 전체와 씨름했으며,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의학의 혼란상이라는 난제를 잘 해결해냈다. 허준의 자긍심은 ‘동의’ 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의학을 동의 곧 동쪽 의학 전통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단지 중국과 조선의 지역적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동쪽에서 만들어진 전통이 중국의 북쪽의 북의 전통, 남쪽의 남의 전통에 견줄 수 있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선택했다. 달리 말해 조선의 의학 수준이 동아시아의학이라는 솥의 세 다리 가운데 하나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조선사람 허준은 조선만이 아닌, 천하의 보배를 생산해냈다. 그 내용은 동아시아 의학과 양생의 종합, 혼란스러운 의학상의 정리와 표준의 확립이었다.

신동원/카이스트 연구교수·과학사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학의 고유성만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학과 다른 한국의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염두에 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프레임에 갇히는 것은 위험하다. 적은 것을 얻고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20세기 이전에는 한의학 또는 중의학이라는 개념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엷었다. 거기에는 오늘날의 과학처럼 오직 의학만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민족성이 일차 기준이 아니라 의학의 수준과 효용이 최고의 가치였다. <동의보감>으로 해서 한국의학은 동아시아의학의 변방이 아닌 핵심 주주임을 더욱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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