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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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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기독교의 '진보적' 색채를 좋아하고 잘은 모르지만 지독히도 프롤레타리아적 삶을 살아간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매력을 느낀다(아버지도 모르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의 삶은 자체가 비극이다!). 그러나 몇몇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는 '내 믿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강요당한다. 그들 중 일부는 나의 생각을 '사탄'의 생각이라 매도하고 기독교에 나타난 진보성을 거부한 채 현실안정의 보수성을 강요한다. 다른 일부는 나 같은 생각은 '믿음'이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란 이래서 힘들다. 기독교인들 스스로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선 외부로부터의 '광신도'의 누명을 써야한다. 또한, 나 같은 '나일론' 신자는 내부로부터의 "믿음이 충만하지 못한 자" 의 비난을 받아야한다. 기독교인에는 '중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기독교인'과 '나일론'만이 존재한다. 아니면 외부로부터의 '예수쟁이'의 비난뿐이다 (이는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중간적 단계가 존재하고 그 단계를 거치는 과정의 사람들도 다 같은 불자로 인정하는 불교와는 사뭇 다르다. 불교의 신자구분이 훨씬 세련 된 건 사실이다). 기독교인으로 살기 힘든 이유가 또 있다. 나는 구원을 받으려 기독교를 믿었건만, 현재의 기독교 행태는 내가 종교, 혹은 교회를 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예수가 인간의 구원(정확히 말하면 멸시받고 천대받는 하층민들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데, 이제 나보고 예수를 구하라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예수가 원한 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의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거지, 자기를 구원하라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 전엔 대기업 뺨치는 규모의 큰 교회에서 자식에게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다 실패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졌었다. 이른바 잘나간다는 교회에서 담임 목사직을 자식에게 물려주려 하다가 사회 안팎에서 비난을 받은 사실은 정말 한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려 할 때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믿음이 충만하지 못한 자" , "사탄의 자식"이라 비난했을 것이다. 누가 사탄의 자식인가는 생각해 볼 일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희망을 갖는 것은 이러한 '사탄의 자식들' 사이에서 묵묵히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집안일에 녹초가 돼서 초저녁부터 쓰러져서 주무시는 어머님의 얼굴에서, 현대사의 굴곡을 몸소 걸쳐 살아오시면서 평생 '사치'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오다(할머니는 평생 화장실 뒤처리를 달력으로 해오셨다), 이제는 자신의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님의 얼굴에서, 새벽 칼바람에도 '사탄의 자식들'이 싸질러 논 쓰레기를 치우시는 환경미화원의 얼굴에서, 남들 출근할 때 밤새장사하고 리어카를 끌고 돌아가는 상인들의 얼굴에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온갖 조롱을 받아가며 땀 뻘뻘 흘리며 설명하는 이등병의 얼굴에서, 한 평생 '남 좋은 일'만 하다 가신 문익환 목사님의 얼굴에서 예수를 본다.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고 예수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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