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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0 17:57 수정 : 2005.11.12 00:29

불의 기억 1·2·3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박병규 옮김. 도서출판 따님 펴냄. 각권 1만7000~1만8000원

남미 군사정권 저항작가 갈레아노 1천권 문헌 섭렵 원주민 민중사 복원 짧은 일화 때론 민담으로 때론 일기로 문학적 감동 저릿한 ‘장대한 서사시’

“1492년 카리브해 과나아니. 콜럼버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춘다. …오늘부터 이 모든 것은 저 먼 곳의 군주에게 귀속된다. 산호의 바다와 해변, 새파란 이끼가 뒤덮인 바위, 숲, 앵무새, 매끄러운 담황색 피부의 원주민들까지 전부 그의 소유물이다. 아직은 옷도 죄악도 돈도 모르는 원주민들은 멍하니 콜럼버스의 무리를 바라볼 뿐이다.”

이후 유럽 침략자들이 ‘신대륙’이라고 주장했던 남북 아메리카(이마저도 그들이 붙인 이름이지만)의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오랜 세월 독특한 문명을 일구었던 아즈테카, 잉카, 마야 제국과 그 주민들은 거의 절멸 위기에 내몰린다. 무자비한 살륙과 전쟁, 노예사냥, 유럽인들이 가져간 전염병으로 인구가 급감하고 갖가지 피부색의 피들이 폭력적으로 뒤섞였다. 금·은 등 재화들은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숱한 유물과 서적들이 파괴당하고 불탔다. 그리하여 ‘인디언’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통칭돼온 그들의 기억은 멸실되고 역사는 사라졌다.

남미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한때 투옥당하고 사형수 명단에도 올랐던 우루과이 출신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불의 기억>(따님 펴냄)은 바로 구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당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기억과 역사를 되살리고 침략자들의 범죄행위를 온전히 드러내려는 시도다. 이 방대한 저작은 짤막하지만 매우 구체적인 사실들을 대부분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엮지 않고 연대기 순으로 폭넓게 나열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침탈사 구석구석 구체적으로 되살려

그러나 1권 앞부분 ‘최초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붙은 그 지역 특유의 신화적 사실에 대한 기술들을 예외로 하면 1492년 콜럼버스의 카리브지역 도착부터 3권 1984년에 이르기까지의 기술 내용은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를 읽는 듯한 내적 연결과 통일성을 느끼게 한다. 각 편들은 문학작품을 보듯 저자 특유의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간결하면서도 때로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체는 원주민들의 파란만장한 기억과 역사들을 구석구석 드러내면서 범죄자들의 잔혹성을 극대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서술내용들이 모두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야기 하나하나는 확실한 문헌 자료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비록 이야기는 내 방식대로 풀어냈지만,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다.” 전승, 민담, 신화, 문헌, 신문기사, 평론, 민요, 대중가요, 일기, 편지, 시, 소설, 역사서적 등에서 인용하는 유명·무명의 개인들이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그냥 늘어놓은 게 아니다. 이런 방식은 서사 전개의 추상화·형해화를 극복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저자는 일종의 민중사라 할만큼 무수한 개인들의 역할과 에피소드들을 부각시키면서 서사전개의 구체성과 활력을 최대화한다.


“기독교도 있다고? 천국 안가겠다”

멕시코 근대회화의 거장으로,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와 결혼한 사실로도 유명한 디에고 리베라(1886-15=957)의 작품 <죽은자의 날>. 멕시코 민중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고 유럽회화의 전통을 멕시코의 전통에 결합시키려 한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특징이 살아 있다.
이런 시각으로 이토록 흥미롭고 섬세하게, 또 풍부하게 엮어낸 아메리카 역사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다.

“1511년 쿠바 야라. 석달 뒤 과아바 지역 타이노 부족의 추장 아투에이가 사로잡혔다. 지금 그는 화형장 통나무에 묶여 있다. 곧 재가 될 운명읻. 장작불에 삼켜지기 전에 신부가 다가온다. 세례를 받으면 환희와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단다. 추장이 묻는다. “천국에도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그렇다” 추장은 결코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

이처럼 각 단편들에 연대와 장소가 표시돼 있고 끝에는 출전표시까지 돼 있는 것도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높여준다. 1천여권의 문헌자료들을 섭렵한 노력이 이를 받쳐주고 있다.

1644년 미국 제임스타운. (만화로도 널리 알려진 이상적인 흑백융합의 전형 포카혼타스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들어갔고) 스페인에서 교육받고 스페인식 이름까지 하사받은 그의 큰아버지, 곧 포하탄 추장의 형 오펙한카노는 예수회 신부들의 안내자와 통역자로 고향땅을 밟아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페인 옷을 벗어버리고 신부들을 죽인 뒤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처녀 아닌 여왕 엘리자베스를 기리기 위해 영국인들이 버지니아라고 이름붙인 이 땅에서 마을과 밭을 휩쓰는 숱한 불길을 보았고, 노예로 팔려가는 형제들을 보았다. 그의 수많은 형제가 천연두에 잡아먹히는 것을, 담배가 옥수수밭을 집어삼키며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곳의 28개 원주민 마을 가운데 19개가 지도에서 사라지는 과정도, 이주를 거부하고 전쟁을 택한 많은 형제들의 죽음도 보았다. 1607년 어느날 아침 영국인들이 체사피크만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3만명에 달했던 그의 형제는 3천명으로 줄었다.

1973년 칠레 산티아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개입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숨지기 직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헬멧을 쓰고 소총을 챙겨든 뒤 최후의 라디오 연설을 한다. “나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위기 순간을 맞아 나는 국민들의 충절에 나의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칠레인의 고귀한 양심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이길 수는 있겠지만, 사회의 진전을 범죄나 힘으로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민중이 역사를 만들며… 칠레국민 만세, 칠레국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나는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삶은 계속된다” 비정한 신념

카스트로와 아르벤스, 소모사와 그 주변 등 미국의 중남미 침탈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도 매우 극적으로 연결돼 있다. 건조한 톤으로 이면사를 들춰냄으로써 오히려 박진감을 높이는 저자의 솜씨가 뛰어나다. 서부극의 영웅 버팔로 빌의 ‘전혀 다른 얘기’도 흥미롭다.

“삶은 계속된다. 삶과 죽음은 계속된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도 변주되는 이 구절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인듯하다. 그러나 그 ‘계속’은 결코 단순반복은 아니다. 죽은 역사가 부활하고 핍박받던 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든 종내에는 승리하리라는, 비장감 서린 강한 믿음을 느낄 수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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