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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의 인연은 1966년 열일곱 살 때부터. 야간중학을 다니며 책을 월부로 팔았다. 당시는 전집뿐 아니라 단행본도 그랬다. <가정백과> 1500원짜리는 다섯달 끊어 한달 300원씩이었다. 걸으면서 종일 책을 읽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그에게 ‘책은 곧 길’이었다. “길 위의 모든 것이 책입니다. 책은 길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아요. 그저 삶을 알아가기 위해 디디는 것일 따름이죠.” 73년 스물네 살 때 두평반 책방을 차렸다. 그만큼 알고 싶은 게 많았고, 그 결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도 되었다. 당시는 큰길에서 영화학교 정문 근처 건널목까지 헌책방이 즐비했다. 그의 책방은 골목 안쪽에서 시작해 큰길 쪽으로 차츰 진출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아벨은 가지를 뻗고 다른 책방들은 점점 사라졌다. 지금은 새책방 한 곳을 포함해 6곳이 남았다. 왜 그럴까. “책방은 죽지 않습니다. 책방 주인이 죽을 뿐이죠.” 죽어가는 게 어디 책방 주인뿐이겠는가. 실제 창고를 지으면서 보니 공사장에 젊은 인부가 없단다. 깨끗하고 폼나는 정보기술 쪽으로 몰려간다는 얘기다. 젊은이들한테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아서라는 진단이다. “책만 읽힌 아이는 머리 큰 귀신을 만듭니다. 설거지도 같이 시켜야 합니다.” 에프엠 선율이 책 사이로 스며들었다. 똘똘한 책들 가운데 <월인석보와 법화경언해의 동의어연구>,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발칙한 한국학> <한국여성사>(모두 3권)가 눈에 들어왔다. “책은 제값은 물론 몸의 수고와 함께 먹는 양식입니다.” 인터넷으로 ‘콕 찍어먹는’ 세태가 아쉽다. 마음 고픈 사람들이 세상을 읽어가는 연습도 하고, 삶의 의미를 읽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살아있는 글들이 살아있는 가슴에.’ 명함의 글이다. 책방이 넓어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인천은 복받은 도시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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