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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0 20:31 수정 : 2005.11.18 18:25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민중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라’시던 선생은
20분이면 걷는 거리를 2시간 넘게 걸었다
마주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기에
호텔에서 대기업 상대 시민운동 후원금 받겠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슬프고 참담하다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그 기사를 나는 나중에야 접했다. 그 즈음 나는 시골에서 계간 <환경과 생명>으로부터 부탁받은, 환경책 서평집에 담을 원고를 쓰고 있었다. 내가 맡은 꼭지는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에 대한 책이었다. 필경 누군가에 의해 사후에 붙여진 헌사(獻詞)이겠지만, 선생의 이름에는 흔히 ‘근세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한국 생명운동의 대부’라는 존경의 수사가 자연스레 떠돈다. 그토록 깨끗한 명예는 살아 생전 선생이 한번도 지도자를 자청하지 않았지만 그를 만나거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레 형성된 평가로 느끼고 있다.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선생은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고, 없는 듯하면서도 어디나 편재해 계셨다’고 한다.

가르치려 애쓰지도 않으면서 그가 몸으로 가르친 내용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민중의 가랑이 아래로 기라’는 것이었다. 원주 봉산동 자택에서 시내까지 걸어 20분이면 족한 거리였는데, 선생은 대개 두 시간여 걸려 길을 걸었다고 한다.

“길에서 만나는 아주머니, 아저씨, 길가의 좌판 장수, 기계 부속품 가게 주인, 리어카 채소장수, 식당 주인, 아니면 농부들, 만나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과 끊임없이 벌이 얘기, 아이들 소식, 농사 얘기, 살림살이며 시절 얘기를 나누는데 보통 두 시간 이상이 걸렸으니 말이다. 나는 그 진풍경을 곁에서 지켜보며 ‘아하! 이것이 밑으로 기어라로구나’ 했다.”

김지하 시인의 회고다. 고심 끝에 ‘이런 세상은 아니다’라는 확신에 이른 이라면 누구랄 것 없이 한번쯤은 가슴 속에 품게 되는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개혁, 즉 혁명조차도 선생은 “때리는 게 아니라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일이다”라고 하셨다 한다. 혁명을 오래 많이 생각해 본 이들만이 마침내 어렵게 다다르는 모성적 경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리영희 선생마저 그를 통해 “사회적 관계나 지적 토대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 자신의 내면적인 것이 분명하게 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고백을 하시지 않았나 싶다.

무위당에 대한 자료를 살피며 잠시 전에 그런 분이 이곳을 다녀가신 일의 벅찬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신문에는 환경재단의 ‘2005 그린 산타의 밤’ 기사가 실렸던 모양이다. 기사는 환경재단이 연말에 하이얏트 호텔에서 산타의 이름으로 후원금을 모으는 행사를 벌이기로 했는데, 이 나라 ‘1천대 기업 중 900여개 기업’에 초청장을 보내며 후원금액을 100만원, 2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이상’으로 등급을 나눠 선택하도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후원회장 입장료도 물경 20만원이라고 기사는 밝혔다. 초청장을 받은 기업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상공회의소에 문의를 하며 곤혹스러워하고 있다고 했으며, 이에 대해 환경재단 쪽에서는 “기업들이 얼마를 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 기업 규모와 사회공헌도 등을 고려해 금액을 제시한 것”이라 설명했다고 씌어져 있었다. 당당한 해명이라기에는 어딘지 궁색하고 과잉친절의 기운이 느껴졌다.

초청장 내용만 메마르게 다루면서도 이 사안의 윤리적 문제점을 전달한 <한겨레>(10월27일치)와 달리, 같은 날 <동아일보>는 “최열 이사가 고문으로 있는 환경운동연합은 최근 매출 상위 30대 기업 등에 ‘사업장을 방문해 지속가능 경영평가를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 재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며, 환경재단 상임이사 겸 환경운동연합 고문인 ‘한국의 대표적 환경운동가’에 대한 강도 높은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 어조는 삼척동자가 봐도 ‘후원금 모금이 아니라 거대단체를 배경삼은 협박’이라는 뜻으로 전달되는 문장이었다.

거대언론이 종종 시민운동을 곱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고,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거대언론은 ‘있는 여론’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스스로 여론을 만들기도 하는 습성대로, ‘너무 커서 시건방져버린 시민운동가 하나쯤은 기회만 오면 죽여버리겠다’는 저의가 읽히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민운동판의 한 사람으로서 이 기사를 보고 참으로 부끄럽고 슬프고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이런 일이 터졌을까. 원인은 바깥에 있지 않다. 그런 황당한 초청장을 발송하면서 아무런 갈등이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재단 사람들의 ‘권력욕’과 잃어버린 초심에 원인이 있다. 정치학자들이 쓰는 말로, ‘잠행성 정상상태’라는 게 있다.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으로서, 지구 온난화 현상과 같은 일이 바로 그렇다. 그들도 처음에는 어떤 일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어떤 일이 마땅히 전력투구해야 할 일인지 또렷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공선을 위한 노력에 대한 시대적 공감과 시민들의 지지가 또 다른 권력이 되어가는 일에 대한 무서운 자기응시와 반성의 습관이 서서히 무뎌지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가·정치가 좋아하고, 호텔 좋아하고, 옥이든 돌이든 ‘유명해진 사람들’을 좋아하는 속물적 현실주의가 거대 시민단체로 힘을 모으는 정상적인 방식인 줄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넘쳐나는 CEO(최고경영자)들과 싸워야 할 이가 바로 CEO의 모습으로 권능화되어 표나는 일에만 에너지를 쏟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생긴 성역과 같은 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춰야만 가능한 공공선 추구의 자세 및 권력비판 기능과 자기희생의 고달픈 길에서 점차 멀어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나라 환경을 이 지경으로 만든 가치체계를 바로 운동의 동력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가 잃어버린 것은 환경위기에 대한 슬픔과 고뇌이며, 얻은 것은 ‘성공한(?) 사람’의 자만이 아니었을까. 이번 일은 바로 이런 추측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무위당은 민중의 가랑이 아래로 기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산길을 걷다가 소리 없이 피었다가 가는’ 풀잎 하나를 보고도 ‘부끄러웠네’ 하고 노래하셨다. 박테리아만 무성한 지금, 무위당 같은 고단위의 윤리적 항생제가 너무 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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