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10 21:38
수정 : 2005.11.1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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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물서 약재 추출한 의학자 “병 원인은 별들에게 물어봐” 파라켈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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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근대 가치관 뒤섞인 혼돈의 시대
합리주의 의학 혁명적 구실 했지만
점성술 등 사이비과학 적용도
그의 학문 속에서는
신비주의·합리주의가 기묘하게 동거한다
의학속 사상/⑤ 파라켈수스의 도전
의학의 역사에서도 ‘과학혁명’과 같이 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의학혁명’이 일어났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의학적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혁명’은 아니더라도 ‘혁명적’ 구실을 한 의학자들은 있다. 파라켈수스(1493~1541)도 그러한 의학자 중 한 사람이다. 원래 테오프라스투스 필리푸스 아우레올로스 봄바스투스 폰 호헨하임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이 의학자는 파라켈수스라는 별명을 1529년께부터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우선 문자적으로는 ‘켈수스를 능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흔히는 로마시대의 유명한 의사였던 켈수스를 능가하는 의사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켈수스가 의사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고 그의 대표작인 <의학론>도 켈수스 자신의 의학 이론은 없고 당시 로마의 백과사전적 전통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모아놓은 책으로 의학적 측면보다는 역사적 측면에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책이다. 뒤에 그의 학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나타나겠지만 파라-켈수스보다는 중세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던 갈레노스의 학설에 도전했다는 의미에서 ‘파라-갈레누스’라고 하는 것이 그의 학문적 경향을 더욱 잘 드러내는 별명일 터인데 왜 구태여 별다른 학문적 특징이 없는 켈수스를 능가한다는 별명이 붙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그의 이름에 대한 논의는 이쯤에서 멈추고 그의 시대와 생애에 대해 살펴보자. 파라켈수스가 태어나고 활동한 시대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그는 중세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종언을 고하고 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탄생을 모색하는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고 활동했다. 그의 학문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와 합리주의, 중세적 특징과 근대적 특징의 기묘한 동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특징이 그의 학문에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시하던 외과술도 배워
파라켈수스는 어려서 의사였던 아버지로부터 광물학, 식물학, 자연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다. 성장해서는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의학을 배웠는데 그는 외과술도 함께 배웠다. 그가 의사로서 외과술을 배운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 행동이었다. 지금은 의사가 외과술을 배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서양에서는 18세기까지 손에 피를 묻히는 외과의는 고상하게 책으로 공부하고 약을 쓰는 의사와는 별개의 직종으로 취급되었다. 대개 외과의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이발사 출신이어서 의사들과는 사회적인 계층 자체가 달랐다. 그런데 파라켈수스는 당시의 이러한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과술을 배워 군대의 외과의로 복무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다가 바젤에서 당시 영향력 있던 인문주의자이자 출판업자인 프로벤의 질병을 치료한 것이 인연이 되어 시의 공의이자 의과대학 교수로 바젤시에 정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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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물서 약재 추출한 의학자 “병 원인은 별들에게 물어봐” 파라켈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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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의학의 교과서로 여겨지던 이븐 시나의 <카논>을 학생들 앞에서 불사르고 라틴어를 사용하던 학문적 관습에 배치되게 독일어로 강의를 하는가 하면 그의 강좌에 이발사-외과의들을 받아들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튀는’ 행동들로 인해 많은 적들이 생겨 결국 바젤시를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나머지 생애를 여러 곳을 방랑하며 보낸다.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마르그리트 유스나르는 방랑하는 파라켈수스를 모델로 <어둠 속의 작업>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파라켈수스는 이렇게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중에도 연구와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아 생전에 출판한 책을 비롯하여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적 업적과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무엇보다도 그는 광물성 약재를 치료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의학에서 본초학이 발달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와 중세의 서양의학에서도 식물성의 생약재를 주로 사용했다. 의과대학에서는 대개 식물원을 갖고 있어 학생들에게 약용식물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다. 식물분류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린네도 의사로서 약용식물에 대해 연구하다 식물분류학의 체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식물은 의학에서 약재로서 많이 사용된 반면 광물질은 약재로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
화학요법의 선구자
그런데 파라켈수스는 적극적으로 광물질을 약재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라켈수스를 화학요법의 선구자로 부르기도 한다. 파라켈수스가 광물질을 약재로 사용하게 된 것은 그가 의학뿐 아니라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연금술사로 보기도 하지만 그는 연금술사들이 전통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문제인 금속의 변환이나 철학자의 돌을 만드는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연금술이란 의학적 치료재로 사용할 수 있는 무독성의 광물질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상처와 만성궤양의 치료에 광물성 약재를 사용해 좋은 효과를 보았고, 수은의 이뇨작용을 알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독할 수 있는 광물약제를 무분별하게 남용하지 않았다. 그는 광물약재의 유독성을 알고 있었기에 사용시에도 용량을 엄격히 제한했고 무독성의 광물만을 사용했다. 또 광물질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질환에도 관심을 가져 직업병으로서의 규폐증을 처음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좀더 이론적인 측면의 공헌에 대해 살펴보면 파라켈수스는 새로운 질병 개념을 제시했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질병 개념은 주로 체액설에 기초한 것으로 특정 체액의 과도함이나 부패에서 유래한 몸의 비정상적 상태를 질병으로 규정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개인에 따라 지극히 다양하게 나타나는 무수한 병적 상태는 있었지만 독립적인 실체로 분류될 수 있는 질병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질병 개념 세워
파라켈수스는 여기에 외적 원인을 가지며 몸 안에 특정한 자리를 가지는 새로운 질병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대기 중에 떠다니는 광물성의 독성 물질을 질병의 원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외적 원인을 그는 ‘실체’라고 불렀고 이런 외적 원인에 의해 생기는 질병 또한 ‘실체’라고 불렀다. 그는 이런 외적인 실체가 몸 안에 들어와 자신의 규칙을 강요함으로써 생명체가 병들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근대적 성격의 실체론적 병리관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고대의학에서 말하는 체액이나 체질과 같은 것들을 실체에 반대되는 허구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새로운 질병관에서 그의 새로운 치료전략도 나온다. 체액설에 기초한 과거의 치료법은 병적으로 과다해진 체액을 발한, 사혈, 구토 등의 방법을 통해 배출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은 몸 안에 들어온 병인을 제거할 특정한 성분을 찾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과거의 치료법이 추구하던 약제의 복합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가진 성분의 추출과 분리를 지향한다.
파라켈수스의 의학에는 이렇듯 근대적 성격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비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도 있다. 그는 천체와 인체 사이의 상응관계를 믿었다. 그는 천상의 별들이 인간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것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땅 위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천상의 별의 기운을 반영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의사는 모름지기 천체의 운행도 아는 천문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복잡한 성격을 지닌 파라켈수스의 학문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연금술이나 점성술과 같은 사이비과학을 과감하게 의학에 도입했고 그로 인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신비주의와 과학의 경계선상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이 가진 과도적 성격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과도적 성격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라켈수스 역시 그 시대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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