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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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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식민지주의 기억 되짚는
베를린 문화행사를 둘러봤다
역사 극복은 ‘미래지향’ 따위
미사여구로 이뤄지지 않는구나 절감
그들의 성숙한 문화 엿보며
이곳이 도쿄라면…
심야통신/베를린의 가을
나는 지금 베를린에 와 있다. 이번에는 1주일 정도의 짧은 체류지만 이 도시에서는 항상 내 흥미를 자극해마지 않는 행사가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바빠진다.
베를린 독일오페라 극장에서 쿠르트 바일(Kurt Weill)의 <마하고니 시의 흥륭과 몰락(Aufsteig und Fall der Stadt Mhagonny)>을 봤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쓴 원작은 폭력, 도박, 매춘 등 온갖 악덕이 판치는 공상의 도시 마하고니를 무대로 자본주의사회와 인간의 욕망을 철저히 풍자하는 작품이지만, 관객 중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고교생 단체관객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일본사회에서는 어린이들에게 교훈 냄새를 풍기는 피상적인 미담만을 보여주려는 경향이 강해, 젊은층이 이런 자극적인 작품을 어른과 함께 즐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어른 자신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몇 개의 미술전람회를 봤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블랙 박스(Black Box)>였다.
켄트리지는 1989년 이래 특유의 모노크롬 드로잉을 활용한 에니매이션 영상을 제작해온 세계적으로 이름난 아티스트인데, 그 지속적인 주제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분리정책)와 그 이후의 시대가 인간에게 준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옛 독일령이었던 남서 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 식민지주의의 기억을 다뤘다. 동서독 통일을 실현하고 EU(유럽연합)의 중심에서 발전을 구가하는 현재의 독일, 그 번영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 베를린 중심가 운타 덴 린덴에 있는 미술관에서 바로 <블랙 박스>에 담겨져 있는 식민지주의의 악몽을 되살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작자인 켄트리지가 남아프리카 출신의 백인이라는 점이다. 즉 그는 말하자면 식민지주의의 가해자이자 수익자였던 쪽에 속한 존재인 것이다. 식민지주의 역사의 진정한 극복은 ‘미래지향’ 따위의 역사의식이 결여된 미사여구를 통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며, 특히 가해자 쪽에서 고통이 따르는 사상적 실천을 감당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작자 켄트리지도, 그 전시를 베를린 중심에서 실현한 기획자도,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한 관객들도 성숙한 문화의 담당자들이다. 과연 일본에서 이처럼 자국의 식민지주의 기억을 다루는 일본인 아티스트가 존재할까? 설령 존재한다하더라도 그 전시가 도쿄 중심가에서 대대적으로 열릴 수 있을까? 또 거기에 많은 관객들이 몰려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자기성찰을 할 수 없는 아이가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부시 정권의 미국이 그러한데, 일본도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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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베를린에서 오래 살아온 윤이상 선생 타계 10돌 기념 콘서트에 가는 것도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윤 선생의 자서전 <상처입은 용>은 나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명저의 하나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에 그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도쿄에서 열렸을 때 나는 윤 선생을 처음 만나뵈었다.
1984년에 일본 군마현에서 열린 쿠사쓰 국제음악아카데미에 윤 선생이 초빙됐을 때 나는 선생의 숙소까지 만나뵈러 간 적이 있다. 당시 내 형 두 사람이 조국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나는 아직 나이 갓 30대에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젊은이였다. 나는 윤 선생한테서 뭔가 구체적인 격려나 위로를 받고 싶었으나 선생은 내 이야기에 지그시 귀를 기울여주었을 뿐 거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다만 호텔 방에 오선지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뿐이다. 선생은 이미 현대음악계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또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매우 바쁜 몸이기도 했으나 촌각을 아껴가며 교향곡 대작 작곡에 몰두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더 높은 것을 찾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추구해가는 그 모습을 봤을 때, 선생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지만 나 자신도 그처럼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1995년 11월2일 나는 베를린에 갔다. 미리 연락을 해서 윤 선생과 인터뷰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작가가 되기로 작심한 나는 <상처받은 용>의 속편이 될 선생의 전기를 쓸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 뒤 선생의 자택에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은 날씨가 추워져 오후가 되자 때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바로 그 시간에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쏟아지는 눈은 하늘로 오르기 위해 용틀임하는 용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비늘이었을까.
그때로부터 또 10년이 지났다. 그날과 달리 올해의 베를린은 따뜻했다. 사흘간 이어진 기념 콘서트에서는 수준 높은 연주가 진행됐다. 특히 11월4일의 <밤이여 나눠라>는 긴장감이 가득찬 최고의 연주였다. 그러나 관객은 많지 않았고 서글프게도 한국인의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번 콘서트는 베를린 국제 윤이상협회의 비상한 노력 덕에 실현됐다. 윤 선생과 친교가 있던 저명한 연주자들은 무료로 출연했다고 들었다. 윤이상의 망명지 독일에서 선의의 독일인들이 중심이 돼 윤이상 예술의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넓히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재정적인 곤란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한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윤이상을 이제는 마치 ‘국민적 예술가’처럼 사람들은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예술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한국사회의 문화적인 성숙도가 어느 정도일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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