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글찻집
외국 농산물 수입으로 값싼 먹거리가 넘쳐나 우리 농민들이 갈 바를 못잡는다. 국회에서는 한 의원이 쌀개방 협상 동의안 처리를 막고자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고, 농민 시위가 끊이지 않으며, 마침내 마을 이장이자 배움과 농사에 열심이던 한 학사농부는 쌀개방에 항의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볏가마·볏섬·벼포대와 쌀가마·쌀섬·쌀포대를 잘 구별하지 못할 만큼 벼농사·나락농사는 먼나라 얘기거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쌀금이 물가 기준이 되고, 농토가 부의 잣대이던 시기는 한참 지났고, 그로 비롯된 수많은 풍습과 제도, 말조차 사라져 간다. 땅을 놀릴 것을 권하는 판이니 말해 무엇하랴만. 아직도 ‘먹거리’란 말에 시비를 거는 분들이 적잖다. 이 말은 참으로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대에 오곡(쌀·보리·조·콩·기장)만이 식량이 아님을 일깨우고자 하던, 일찍이 독립운동가였던 김민환이란 분이 수십년 노력한 끝에 빛을 본 말로서, 고기는 물론 요즘도 살빼기나 건강식으로 찾아 먹는 온갖 남새·과일, 감자·고구마·송기 따위를 두루 일컫는다. 이것이 마땅히 ‘먹을거리’여야 하는데, ‘먹거리’로 쓰니 조합이 잘못됐으며, 사람들의 문법 의식을 흐리게 한다는 비판이 있고, 일부 국어사전은 아예 ‘먹을거리’의 잘못이라고 올리기도 했으니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먹다’의 말뿌리인 ‘먹-’이 들어가서 만든 말들을 살펴보자. ‘먹는장사, 먹보, 먹을알, 먹음먹이, 먹음새, 먹이, 먹이다툼, 먹이사슬, 먹이양, 먹이작물, 먹임소리, 먹잇감, 먹자골목, 먹자리, 먹자판 …’ 이 가운데 먹+보, 먹+이, 먹+자리 들은 말뿌리 ‘먹’에 그런 사람을 뜻하는 ‘보’, 사물을 뜻하는 뒷가지 ‘-이’, 곳을 뜻하는 ‘자리’가 붙어 만들어진 말들이다. ‘먹+거리’와 다를바 없는 조합들이다. 여기서 ‘먹자리’는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먹이 영역’이란 뜻인데, ‘먹자리 은어’라면 ‘떠돌이 은어’와 구별된다. ‘먹이’는 주로 ‘사료’를 뜻하지만 오히려 먹거리와 통하는 데가 많다. ‘성질’을 뜻하는 뒷가지로 ‘성’(性)을 즐겨 쓴다. ‘먹성’도 그 한가지다. ‘옷’을 ‘입성’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성’은 뒷가지 ‘-성’과는 다른 것으로 보고 있다. 사전편찬인 조재수 님은 움직씨 뿌리에 이름씨가 붙어 된 말들로 ‘걸그물·꺾쇠·깎낫·누비옷·덮밥·붙장·익반죽·접부채·접의자·접칼·호비개…’ 따위를 들고 있다. 이 정도면 그 역사·됨됨이·쓰임새로 보아 ‘먹거리’ 시비를 그만둘 때가 된 성싶다.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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