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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17 19:02 수정 : 2005.11.18 13:58

잃어버린 풍경 1 1920~1940 서울에서 한라까지
잃어버린 풍경 2 1920~1940 백두산을 찾아서
안창남, 민태원 외 지음. 이지누 엮고 씀. 호미 펴냄. 각각 1만1000원

옛잡지서 고른 1920~40년대 명사들 기행문 김사량 “쭉정이 갈아 죽쑤는 산골엔…” 이광수 “노예적 조선사는 내 역사 아니다” 그시절 풍경·삶 눈에 잡히듯 걷기·섬세한 글쓰기·느림의 미덕 등 우리가 잃어버린 것 깨닫는 재미 ‘솔솔’

기행문이란 무엇이뇨. 어딘가를 다녀온 기록이라. 풍광과 느낌을 주로 담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색적이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음은 일독으로 족하다. 두고두고 시선을 고정시키기로는 사람이 제격이다. 예서 사람은 자신일 수도 있고 자연 속의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이면 느낌으로, 자연 속의 사람이면 풍광으로 드러난다.

1920~194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이뇨. 일제가 기승을 부리던 때라. 3·1만세운동으로 잠시 부푼 민족의식이 꺼지고 물자와 사람들이 온통 전쟁으로 내몰리던 때다.

관광지 소개하며 은근히 총독부 비판

하필 20~40년대 기행문인가. <잃어버린 풍경> 1, 2(호미 펴냄)를 엮은 이지누씨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함이라 한다. ①걷기 ②섬세한 글쓰기 ③결과보다는 과정을 천착하기가 그것. 한마디로 ‘느림’이다. 속도만이 예찬되고,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시되는 현재의 자리에서 새삼 과거를 바라보기다. 무라야마 지준 또는 가린 미하일로브스키가 서있는 자리와 무척 닮아있다. 이들이 동시대에서의 내려다보기라면 엮은이의 시선은 시대를 달리한 내려다보기다.

기록이란 무엇이뇨. 펜을 가진 인텔리겐차의 전유물이라. 게다가 당시 공간된 잡지 <개벽> <별건곤> <삼천리>에서 주로 골랐다 하니 내용과 표현은 현실과 타협일지언정 엮은이가 보고자 하는 느림은 도처에 널렸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느낌조차 드는 20~40년대 기행문 모음에서 숨은 그림 찾기는 즐거운 경험이다. 본디 책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제 나름의 삶을 살지 않겠는가.


기행문이거니 글쓴이의 심사나 식민세태를 끼워넣기에는 여반장이다. 끼워넣어진 소재와 글쓴이의 기술을 엿보는 재미가 이러하다.

“미아리에 당도하니… 백사청송이 사라진 산의 낮은 언덕에 점점이 산재한 흙무덤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씩 모여 서서 성묘도 하고 새로 벌초도 한다. … 제물의 냄새를 맡고 이산저산으로 휩쓸려 날아다니는 까마귀의 소리도 슬프거니와 잘려진 꽃가지에 피눈물을 토하는 두견새의 소리는 더욱 구슬펐다.” (차상찬 ‘우리동의 봄을 찾다’)

경치를 읊은 것이나 저변에는 ‘민족의 현실이 무덤같다’는 생각이 깔려있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은 장경각 불사가 잇으니 조선 총독이 10,000원을 내서 팔만 대장경을 복사하여 만주국 황제에게 헌상하는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라고 쓴 정문에 금단방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장경각 안에서는 23조로 나누어 복사 검열이 잇고 총독부에서 내려온 기술자들과 도감은 이것을 감독하고 잇다. 2개월 넘어 하는 이 불사는 그 규모가 큰 뿐 아니라 하루 노임을 1원에서 3원씩 받는다.” (나혜석 ‘해인사 풍광’)

관광지를 소개하면서 은근짜 총독부의 행태를 꼼꼼하게 적었다. 이에 비기면 관광지의 아름다움을 끄적거림은 얼마나 열등한가.

“방안 흙벽에는 빈대 처진 자리가 군데군데 보이는데 웃목에 화대가 놓여있고 가구라고는 석유상자와 곡식자루 같은 것이 있을 뿐이다. 가장 작은 어린애 놈은 옻이 올라 얼굴이 온통 부었는데 배에 큰 종기까지 생겨 몹시 고단스러운지 보챈다. 그리고 밀망을 갈고 있다고 하지만 모두 쭉정이뿐으로 그걸 갈아서 호박이나 좀 썰어넣고 죽을 쑤어 먹는다 한다. “머 이럭저럭 살아가지유” 하며 연신 여러 가지 말을 갖추는 품이, 그들의 인사는 이렇게 시작되는가 싶었다.” (김사량 ‘비오는 날, 산골 마을에서의 세시간)

편집한 식민 현실 예리하게 묘사

1920년대 우이동 계곡은 골 깊고 물 맑아 좋은 원족장소로 꼽혔다. 걸어서 가면 왕복 12시간 정도 걸렸다. 시내-시골 경계인 전석고개(혜화동~삼선교)를 넘어 미아리 공동묘지를 거쳐 수유리에 이르면 촌가에서 막걸리를 팔았다. 호미 제공
차가 고장나 단 세시간 동안 머문 산골에서 식민현실을 이보다 더 핍진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기록자의 예리한 시선이 보인다.

“손가락을 물 속에 넣어 헤적거리면 논개가 입고 죽었던 그 치맛자락 끝이 걸려 나올 것 같고 바위와 바위틈을 샅샅이 들추어 보면 그때 논개가 끼었던 가락지와 비녀들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만일 이 물결소리와 바람소리만 아니 들리었던들, 삼백 년 전에 이 바위 위에서 딸랑 하고 떨어지던 논개의 그 비녀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김동환 ‘논개야, 논개야, 초여름의 촉석루를 찾다’)

‘국경의 밤’을 노래한 시인답지 않은가.

“나는 조선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지우고 싶다. 그러고 삼국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 그 중에서도 이씨 왕조의 조선사는 결코 조선인의 조선사가 아니요, 자기를 버리고 중국처럼 되고 말려는 어떤 노예적 조선인의 조선사다. 그것이 결코 내 역사가 아니다. 나는 삼국시대의 조선인이다. 고구려인이요, 신라인이요, 백제인이다. … 아아, 나는 사비성의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못견디겠다.” (이광수 ‘백제 궁궐터에는 보리만 누웠더라’)

반면에 이런 인간도 있다. 옛날은 돌아갈 수 없는 것. 결국은 친일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글재주가 있으면 뭐 하나.

“멀리 보이는 희미한 연기는 바위 봉우리 곁으로 살짝 오른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끌며 정서를 끌어당기는 것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기슭으로 깃든 초가집에서 자줏빛 치마를 입은 어린 소녀를 이끌고 나와 손바닥만한 채마밭에서 채소를 뽑는 섬 아낙들이다. 아, 그들의 생활! 얼마나 재미있을까. 남편은 고기 잡고 아낙은 채소 뽑고 소녀는 재롱부리는 한가로운 섬의 한갓진 생활?!” (가자봉인 ‘강화행’)

단순·치졸한 것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다.

함대훈의 유치뽕짝, 가람 이병기의 무색무취, 민태원의 일본적 시각, 한용운의 행동하는 삶도 엿볼 수 있다. ‘잃어버린 풍경’은 사람 서리에서 고스란하다. 글과 사람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재발견되나니 두려워할저.

백두산 걸어 오른 감회 생생

“봉우리 꼭대기에 올라서니 몸이 허공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나며 기이하고 통쾌함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을 열게 한다. 온 천지는 깎아지른 절벽이며 고봉이 은하수를 만지기라도 하려는 듯 서 있으니 이것이 오른쪽의 천왕봉과 왼쪽의 병사봉이다. 그런데 천왕봉은 아직도 분화할 때의 불탄 자국이 시커멓게 붙어있는지라 지금도 곧 터질 것 같은 위압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감탄스러우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을 만치 신비한 거물이 앞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물을 것도 없이 백두산의 대택이니 천지다. … 이 천지를 내려보는 순간에는 언어가 끊어질 뿐더러 생각조차 텅 비어 버리고 만다.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의 삼보예찬을 드렸다.” (대은 ‘동방의 히말라야 백두산 종보기’)

비행기로 휑 날아 지프로 오르는 요즘의 백두산행으로는 도저히 이르지 못할 감회다. 2권 백두산 편에 이르러 엮은이의 의도가 잘 배어난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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