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4 18:11
수정 : 2005.11.25 14:17
역사로 보는 한주
1970년 11월25일 도쿄 육상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에서 유명 작가이자 우익 활동가 미시마 유키오(당시 45살)가 할복자살했다. <금각사> <가면의 고백> 등의 탐미주의적 소설과 <사드 후작부인> 등의 희곡, <문화방위론> 등의 에세이, 도쿄대 전공투 주최 토론회 참석, 영화 출연 등 왕성한 활동으로 일본 안팎에 이름을 날리며 노벨 문학상 수상후보로 거론되던 시대의 총아 미시마의 기괴한 자살행각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날 그는 민족주의 학생운동조직 멤버들을 끌어들여 만든 ‘방패회(다테노카이)’ 회원 4명과 함께 도쿄 이치가야에 있는 동부방면 총감부의 총감실을 찾아가 명검을 보여주겠다며 접근했다. 칼을 살펴 본 총감이 칼을 칼집에 꽂는 순간 그들은 갑자기 달려들어 총감을 의자에 앉히고 묶은 뒤 농성에 들어갔다. 총감실 발코니로 나간 그들은 성명서를 뿌리고 플래카드를 내건 뒤 천황제 부활과 ‘평화헌법’ 폐기 등을 주장하며 자위대의 궐기를 호소했다. 자위대원들은 그러나 미시마의 ‘초현실적’ 쿠데타 선동에 냉담했다.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대원들 사이에서 “미시마! 정신차렷!” “무슨짓하는 거야, 바카야로!” 따위의 야유가 터져나오자 비분강개한 그는 몇분만에 연설을 중단하고 총감실로 들어가 할복했다. 미시마의 동성애 상대라는 소문이 돌았던 모리타 마사가쓰가 칼을 빼들고 그의 목을 여러번 내리쳤으나 실패했다. 검도 유단자 고가 히로야스가 그 일을 완수한 뒤 모리타도 할복했고, 역시 고가가 그의 목을 쳤다. 그 자살극은 약 1년간 몰래 준비한 것이었다.
미시마는 민족주의 잡지 <논쟁 저널>을 중심으로 민병조직 중심의 국토방위론을 주장하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했으며 F104 전투기를 시승하고 <자위대 방위구상>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방위론>에서 전쟁희생자들에 대한 책임론을 들먹이며 천황 퇴위를 주장한 그는 본격 우익 민족주의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으며, 그의 시대착오적인 사무라이 기질 때문에 좌익으로부터도 경원당했다. 조모 나쓰코는 사무라이 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조부는 평민출신이었으나 관료로 출세해 식민지에서 한몫 챙겼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갈래지만, 김지하의 시 <아주까리 신풍-미시마 유키오에게>가 압권이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신풍(가미카제)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