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4 18:42
수정 : 2006.02.2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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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민사 ‘신생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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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다 이책
내가 <신생철학> 초판을 접한 것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이었다. 출판사 일로 부산에 가게 되었는데, 양서협동조합을 만들어 도서보급운동을 벌이던 한 후배가 부산지방 출판사에서 발간된 <신생철학> 초판본을 건네주며 “재미있는 책이니 한번 읽어보라”는 것이었다.
그 책은 들쑥날쑥 편집에 허술한 장정, 싸구려 인쇄 내음이 물씬 풍기는 자비출판본으로, 비교적 깔끔한 출판작업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로서는 심드렁하게 받아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서울행 고속버스에서 심심풀이로 책을 펴들자 나도 모르게 그 책의 마력에 빠져 서울까지 오는 내내 눈을 떼지 못하였고, 집에 와서도 완전히 독파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후 <신생철학>에 대해서 잊고 있다가, 1982년 가을께 절판된 그 책을 재간행하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당시 서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저자 윤노빈 교수와 만나게 되었다. 일단 윤 교수와는 초판의 편집상의 문제점들을 고치고 내용을 조금 보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신생철학>의 재발간은 출판사 사정으로 차일피일 미뤄졌고, 나는 윤 교수와의 약속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재직하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학민사를 창립하게 되었다.
윤 교수의 월북을 알게 된 것은 1983년 겨울쯤이었다. 부산에 들렀다가 윤 교수의 형제들과, 윤 교수가 지도교수로 있었던 부산대학교의 한 서클 학생들이 윤 교수 사건으로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윤 교수가 대만에 유학갔다가 가족과 함께 ‘또 하나의 반쪽’을 택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는 전두환 폭압체제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어 국립대 교수가 독재체제를 비판하고 월북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민은 물론 대학사회에서도 윤 교수의 월북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몇몇 지인들 사이에서만 떠돌다가 곧 잊혀지고 말았다.
나는 유월항쟁이 끝나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9년에야 윤 교수와의 약속을 지켜 <신생철학>을 재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도 월북 인사의 책을 마음놓고 출간하고 대중을 상대로 홍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책은 발간하였으나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아 언론기관에 신간안내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출판 마케팅이었다.
이 책은 2003년에 새롭게 편집하여 세번째로 발간되었다. 김지하 시인의 회고록을 읽다가, 김시인이 조동일 교수와 함께 윤노빈 교수를 존경하는 친구이자 스승이라고 평가한 대목을 보게 되었다. 세번째 책에는 김지하 시인의 글과 독일유학 시절 윤 교수와 가까웠던 송두율 교수의 발문을 함께 실었고, <부산대학교논총>에서 윤 교수의 논문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를 찾아 덧붙였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에 의해 “송두율과 함께 민족통일 이후 우리 철학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윤노빈의 <신생철학>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여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윤노빈 교수를 생각하면 지금도 남과 북 모두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인도배 타고르호를 타고 가다 한밤중 갑판 위에서 홀연히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린 <광장>의 석방 포로 ‘명준’을 떠올린다. 윤 교수 역시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또 하나의 반쪽’을 택했다지만, 이 고독한 지식인에게 남북 어디에서나 우리를 칭칭 동여매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질곡이 그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김학민/학민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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