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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18:55 수정 : 2005.11.25 14:16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재곤 지음. 푸른역사 펴냄. 1만4500원

일본, 김옥균 이용가치 없어지자 암살 묵인 그의 죽음을 청나라 침략 명분으로 활용했다 암살자 홍종우는 근대화 막은 ‘흉한’ 이었나? 대한제국 옹립해 자주적 근대화 도모 개화-쇄국 이분법 넘어선 ‘제3의 방안’을 위한 변명

1884년 12월4일 김옥균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일본의 힘을 빌려 보수파를 제거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던 게 그의 목표. 대원군 송환, 문벌 폐지, 지조법 개혁, 내시부 해체, 탐관오리 정죄, 순사제도 실시, 혜상공국 해체, 근위대 창설, 호조로 재정 일원화 등이 일종의 쿠데타 공약. 그러나 사흘만에 진압되어 일본으로 도주한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머물며 재기를 노린다. 하지만 체류 10년동안 그를 유폐하는 등 일본에게 그는 이용가치가 끝난 퇴물이었다. 김은 배신감을 느껴 청의 힘을 빌기로 한다. 1894년 3월28일 상하이 뚱허양행 2층. 리훙장을 만나러 온 김옥균을 동행하여 전날 함께 투숙한 홍종우는 권총 세 발을 쏘아 김을 사살한다. 홍은 △김옥균이 갑신쿠데타때 죄없는 사람을 많이 살해했다 △국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외국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왔다 △조-청-일 즉 아시아의 국제관계에 큰 해를 끼쳤다고 발명한다.

홍종우는 조선 정부의 사주를 받아, 근대화를 도모한 김옥균을 살해하고 그 공으로 출세한 ‘흉한’으로 되어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통상 아는 ‘사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푸른역사 펴냄)의 출발선이기도 하다.

김옥균과 홍종우는 한살 차. 마흔넷, 마흔다섯 나이에 중국 상하이에서 죽이고 죽는 관계로 엮인 이들은 영판 다른 삶을 살아왔다. 김이 좋은 집안에서 엘리트코스를 밟아 입신출세를 하고 쿠데타의 주모자가 될 정도로 정치판의 핵심에 놓였다면 영락한 집안의 홍은 어찌어찌하다가 유럽으로 흘러가 프랑스물을 먹은 주변인일 뿐이다.

상하이에서의 ‘이상한 만남’ 이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그들이 걸어온 길 만큼이나 대조적이다. 한 사람은 죽어서 영화로운 사람으로, 또 한 사람은 살아서 치욕스런 사람으로.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지은이의 목소리가 삐딱해지기 시작한다.

절대군주체제 구축 열강 침탈 대항


일본의 방조없이 김의 청국행이 가능했을까? 김을 수차례 유폐하면서까지 행동을 감시했던 일본 정부가 김의 청국행을 묵인한 것은 암살을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정부는 암살 두 달 전부터 암살계획을 감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김이 살해되자 생전의 썰렁한 대우와 달리 그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위해 분투하다 희생됐다면서 호들갑을 떤다. 극우인사 20여명으로 장례위원을 삼아 상하이에서 가서 시체를 인수하고, 기념비 건립을 위한 의연금 모금을 결의한다. 김의 장례식에는 82개 언론사 대표가 참석한다. 일본은 김의 암살을 기화로 국내의 정치불안을 타개하고 청에 대한 침략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김옥균은 살아서 엘리트였고 죽어서는 근대화를 도모하다 실패한 영웅이 됐다. 반면 변변찮은 집안의 홍종우는 거사 뒤의 영달은 일시였고, ‘흉한’으로, 근대화를 거부한 꼴통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홍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홍과 김은 방법론에서 충돌하였을 뿐 목표는 같았다고 분석된다. 그림은 매당소국정이 그린 ‘김옥균씨 조난사건’.
한편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서울에 온 홍종우는 홍문관 교리에 특채된다. 홍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열강간 세력 균형이 이뤄지면서 본격 활약한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홍은 고종에게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고 황제 칭호식을 거행하여 왕을 황제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건원 연호를 광무로 정할 것을 건의하여 실행케 한다. 홍은 그 공으로 궁내부 외사과장에 취임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다. 그러나 그의 전성기는 대략 대한제국 전반기. 이때의 언행이 그에 대한 재평가 잣대가 된다.

광무개혁 때 신정권은 유생과 관료로 대표되는 세력과 개화파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연합이었던 바 홍종우는 길영수, 이기동, 이용익 등과 함께 제3의 세력을 형성하여 실질적 개혁을 담당한다. 이때 홍은 모두 11차례의 상소를 올려 사회 전분야 개혁을 주장한다. 경제부문에서 열강이 조선의 이권을 침탈하지 못하게 하고 재정을 확충하고 국내 상인이 몰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러은행 설치 반대, 절영도 석탄고 임대와 광산이권 양도 반대, 조선 연해 어업과 홍삼 사매 반대, 방곡령 실시, 광무연호 화폐 주조, 외국상인의 도성 및 내륙에서의 상업활동 금지를 설파한다.

정치사회 부문에서는 황제권의 절대화, 군권 확립, 각국 고문관과 공사의 내정·군사권 간섭 반대, 불평등조계 개정, 만국공법 철저 준수, 공정한 인사정책, 서양종교 반대, 민선의원 설립을 진언한다.

그런데 홍종우와 갑신쿠데타 세력을 계승한 독립협회(독립신문)는 사사건건 대립한다. 홍종우가 외국군대의 철수, 하원 개설, 방곡령 실시, 도성내 외국상점 금지, 홍삼전매 실시, 광무연호 화폐 주조 등을 주장할 때 독립협회는 반대, 시기상조, 불가를 외쳤다. 홍은 1898년 12월 황제에 충성하는 단체인 황국협회의 보부상 차림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습격해 해산을 주도한다. 이를 기점으로 산 홍종우는 죽은 김옥균과의 대립에서 몰락한다.

난 김옥균이 업은 외세를 쐈다, 홍종우
홍종우가 김옥균보다 우위에 있었던 기간은 통털어 4년안팎. 이후 친일파가 줄곧 득세하면서 김옥균은 승승장구하고 홍종우의 추락은 끝을 모른다.

러일전쟁 직후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모두 귀국 복권되었고, 근대화 모델을 일본에서 찾고자 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추원 참의, 관찰사 등에 임명된다. 김옥균은 융희 4년(1910년)에 충달공을 추증되고 1920년대 들어 흠모세력들은 김옥균을 덧칠한다.

식민 말기에 이르면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통한 아시아 지배와 조선민중에 대한 통제명분을 김옥균의 ‘삼화주의’에서 찾는다. 일본인은 그렇다 쳐도 조선의 친일 협력배는 꼴사납다. 김기진은 삼화주의를 ‘동아 신질서=대동아공영권의 건설=대아시아주의’로 규정하고 김을 ‘아시아주의의 빛나는 선구자’로 추켜세운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민태원이라는 자는 김의 행적이 자주독립정신의 고양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피력한다.

친일파 득세하며 김옥균 점점 추앙

“이제는 진실을 말할 때가 아닌가.” 지은이의 소리없는 외침이다.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황실 중심으로 강력한 절대군주체제를 구축해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홍종우에게 외세에 기대어 군주를 능욕한 김옥균은 제거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김옥균의 심장을 겨눴던 홍종우의 권총은 지은이의 것이 되어 친일배에 의해 미화된 김옥균의 심장을 다시 겨누고 있다. 그러나 결론은 한발짝 후퇴해 있다.

“개화파와 1884년 갑신정변, 1896~1898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역할은 강조되어야 하지만, 이런 운동을 한 인사들만이 유일한 근대지향 세력이라는 이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같은 개화인사임에도 그들의 지향과 달리 대외적으로 자주와 독립, 대내적으로 공론과 공도를 핵심으로 하는 홍종우와 같은 제3의 근대화 방안도 있었기 때문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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