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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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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의 책으로 만나는 과학
블링크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무열 옮김. 21세기북스 펴냄 오랜 비행기 여행의 필수품은 몇 권의 책이다. 장시간 비행기 여행은 고역이지만 책에만 고스란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은 바쁜 생활 속에서 누리는 기쁨 중 하나다. 출장 떠나기 전, 책장 앞에서 여행가방에 넣을 책을 이리저리 고르는 순간, 나는 소풍을 떠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이번 주 체코 프라하 출장을 위해 단번에 집어든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였다. 지난 주 각 신문의 책 섹션을 화려하게 장식한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잡지 <뉴요커>의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인 글래드웰이 쓴 두 번째 책이다. 그는 글의 소재를 골라내는 탁월한 기획력을 가지고 있고, 적절한 예제들을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특별한 재능이 있으며, <뉴요커> 특유의 세련되고 위트 있는 문체를 구사해, 많은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의 첫 번째 책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티핑 포인트>(21세기북스, 2004)는 ‘어떻게 작은 아이디어가 유행이 되고 빅히트를 치는가’를 통해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면, <블링크>는 개인의 순간적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가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글래드웰이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우리가 어떤 상황을 접하는 처음 2초 동안, 우리의 무의식이 수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해 내리는 판단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순간판단 속에는 이미 축적된 전문지식과 경험이 녹아 있어 ‘막연한 직감’보다 신뢰할 만하며, 이 순발력 있는 판단이 때론 오랜 조사나 탐구보다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가 조각상을 보고 이것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를 가려낼 때, 오랜 조사를 통해 얻은 결론보다 단번에 얻은 인상과 판단이 때론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우리 언론에서도 주목하긴 했지만, 내 개인적 평가는 ‘좀 실망스럽다’에 가깝다. 우선 글래드웰 스스로도 순간적 판단을 뜻하는 ‘블링크’를 명확히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가 조각상을 보고 내리는 빠른 판단은 ‘블링크’로 보여지지만, 심리학자가 부부의 대화를 15분간 듣고 이혼을 예측하는 것과 유권자들이 대통령 후보의 얼굴 인상을 보고 투표하는 것, 콜라 시음대회에서 눈 가리고 콜라맛을 판단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블링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필자는 순간적 판단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어, 왜 그것이 신뢰할 만한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선입견이나 다른 외부 영향에도 민감해서, 많은 경우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게 만든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결론은 ‘순간판단을 잘하기 위해서 경험과 전문 지식을 쌓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편견을 버리며, 자신의 순간 판단력을 믿고 마음을 열라는 것이다.’ 이 모호한 결론을 얻기 위해 그는 너무 많은 길을 돌아 온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 책의 놀라운 미덕은 꼼꼼히 분석하고 따지면 흠이 많지만, 읽고 난 직후의 순간적 판단은 ‘명쾌하고 산뜻하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이 경우에도 우리의 ‘블링크’가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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