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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19:39 수정 : 2005.11.25 18:00

세일즈맨의 탄생
월트 프리드먼 지음. 조혜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1만5000원

작가 마크 트웨인은 성공한 책장수였고 존 페터슨은 100년전 할부·신용판매 개발… 서부개척 시대부터 IBM 세일즈맨까지 미국과 자본주의 발달의 필수요소였던 판매의 역사 흥미진진하게 추적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49)에서 30년 이상 같은 회사에서 판매원(세일즈맨)으로 충성했으나 늙어 효용가치가 떨어지자 ‘팽’당하는 로만은 절규한다. “오렌지만 먹고 껍질 버리듯 할 수는 없어. 사람은 과일이 아냐!”

젊은 시절 인기 좋았던 늙은 출장 판매원을 만난 뒤 판매원의 삶을 택했던 그는 이제 무기력한 노인이 됐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가족이 직면한 문제들로 혼란에 사로잡힌 그는 아내와 아들들이 생명보험금을 탈 수 있도록 자살한다.

판매원들은 혁신·변화의 중심

사회학자 라이트 밀스는 <화이트 칼라>(1951)에서 미국 경제 전체가 자극을 위한 정교한 기술을 연구하는 시장조사가들, 인사과 직원들, 그리고 판매 관리자들이 운영하는 매장으로 타락했다고 개탄했다. 비대한 기업 광고와 판매전략이 부른 왜곡과 낭비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은 끝이 없다.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풍요로운 사회>(1958)에서 미국경제가 기업들이 제품 구매욕구를 충동질하기 위해 매년 1100억달러를 쏟아붓는 불합리한 전략 위에 건설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하버드 경영대학원 역사학자 월트 프리드먼의 <세일즈맨의 탄생>(말글빛냄 펴냄)은 제목부터 그러하거니와, 약간 시각이 다르다. 우선 그는 “현대 세일즈맨십을 아는 것은 미국의 경제와 사회변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한다. 미국이 아니라 전세계, 또는 자본주의사회로 바꿔 놓아도 이상할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판매원들은 산업화, 혁신, 변화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들이 하는 약속, 질문, 고객의 거절을 다루는 기법, 방문, 판매는 악덕이면서 미덕이었고, 전세계 곳곳에 자본주의의 이념을 펼쳤다.” 한마디로 세일즈맨 없는 미국과 자본주의 발달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세일즈의 역사는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됐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남북전쟁 직전 판매업에 종사하던 행상인들은 1850년에 1만669명, 1860년에는 1만6594명이었다. 2000년엔 판매직에 종사한 사람들의 수는 1600만명, 전체 고용인력의 약 12%였다. 한때 세일즈 분야를 대체할 듯이 보였던 광고의 위력이 점점 더해감에도 불구하고 세일즈맨은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다. 최근엔 초기에 남자들 독무대였던 판매원 인력의 49.6%를 여성이 차지했다. 세일즈맨이 아니라 세일즈퍼슨(salesperson)이라는 단어가 유행한 배경이다. 하이테크와 금융업 분야는 개별기업이 10만명, 많게는 수백만명의 판매인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현대 세계경제를 이끄는 미국을 배경으로, 서부개척 시대의 피뢰침에서부터 재봉틀과 계산기, 자동차를 거쳐 IBM(아이비엠)의 탄생과 발전까지 어떻게 판매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길고 복잡다단한 과정을 통해 세일즈가 경제행위의 근간으로, 학문의 한 분야로, 그리고 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가를 다양한 사례와 함께 연대기식으로 들려준다.”


대공황때 세일즈맨은 뭘 팔았을까
1800년대 미국에는 통일된 화폐가 없었고, 한 주에서 다른 주로 물건을 파는 행위는 마치 국외 무역과 같았으며, 주민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하거나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얻었다. 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바로 보따리장수, 행상인, 도붓장수였다. 남북전쟁 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세일즈맨 가운데 하나가 서적외판원이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던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 <톰소여의 모험>을 쓴 마크 트웨인이었다.

학문·과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아

예컨대 그는 자신의 책 <철부지의 해외여행기>(1879) 총판을 조카 찰스 웹스터에게 맡겨 3만2000달러(현시세로 약 59만달러)의 순수익을 올렸으며, 남북전쟁의 영웅 율리시즈 그랜트(18대 대통령) 장군 회고록을 기획 출판하고 예약판매용 영업망 구축과 외판원 모집까지 해서 1·2권 세트 32만5000질을 팔아 45만달러(현시세 80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그랜트 가족에게 안겨줬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부류의 세일즈맨들이 미국 전역을 누비고 있었다. 출장판매원, 방문판매원들인데, 그들은 대형 도매상에 고용돼 월급에다 판매 성과급을 받아가며 독립적으로 일했다. <뉴욕타임스>는 1882년에 9만5000명의 지방담당 방문 판매원들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1800년대 말에는 대량생산체제를 갖춘 제조업체들이 도매상을 이용하지 않고 자사의 정예 세일즈맨들을 채용해 처음으로 ‘현대적’ 영업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대량생산업체들은 자체 브랜드를 갖고 마케팅과 광고 같은 다른 판촉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세일즈맨이 지상전을 치르는 보병이었다면, 광고는 공중전을 치르기 위한 무기였다.” 싱어 재봉틀, 버로우즈 계산기, 본색 권련담배, 츄잉 검, 하인즈, 캔들러의 코카콜라가 등장했고 주 간의 교역을 가로막는 법률 개폐가 이뤄졌다.

1884년 내셔널 금전등록기(NCR)회사를 세운 존 패터슨은 성과급, 대리점, 직영제, 급여제, 과학적 판매제, 외판원제도, 수당제, 장려금, 자회사, 할부제, 신용판매 등 지금도 살아 있는 갖가지 판매방법들을 개발하고 개량했다. 그와 함께 일했던 토머스 왓슨은 1914년에 따로 떨어져 나와 CTR(시티아르)에 들어간 뒤 사장이 되고 회사명을 IBM으로 바꿔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키웠다. 그 무렵 펜실베이니아대, 시카고대, 캘리포니아대, 뉴욕대, 다트머스대, 하버드대 등에서 유통과 마케팅, 판매관리 과정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광고의 홍수도 판매원 대체 못해

세일즈 분야는 광고에 위축됐으나 판매직 종사자는 그 뒤에도 계속 늘어났으며 전국잡지, 텔레비전 등이 등장한 뒤에는 판매원들이 광고에 출연함으로써 광고와 세일즈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광고는 그 뒤 양적으로 증가하고 더욱 세련돼갔으나 판매원을 대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기업들은 20세기 말, 세기 중반보다 더 많은 판매인력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판매원들은 새로운 발명품들을 공급하고 소개하고 설명하면서 구매의욕을 북돋고 질문에 답하고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며 제품에 호감을 갖게 만든다. 이처럼 그들의 역할이 지대함에도 미국에서 판매원들에 대한 평가는 신통찮고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것은 특이할 정도로 쉽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는 셈인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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