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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21:25 수정 : 2005.11.25 14:11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이미 든 1조원 아까워 5조원 더 들인다고? 단군 이래 전쟁 빼곤 가장 어리석은 짓 농림부가 나서서 농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광기어린 국민사기극 종료 아직 늦지 않았다

녹색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새만금 어민들이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한 지 벌써 한달 째다. 그들은 새벽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시위를 하곤 밤열차를 타고 다시 갯벌로 돌아간다. 2.7㎞ 남았다는 4공구 방조제를 무리하게 연결해 죽음의 콘크리트 벽을 만들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게 터서 바닷물 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갯벌도 살리고, 새만금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게 그들 어민들의 요구다. 갯벌 죽으면 조개가 안 잡히니 돈 달라는 요구도 아니고, 이사 갈 비용을 달라는 요구도 아니다. 멀쩡한 갯벌을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살릴 수 있다는 소박한 요구일 뿐이다. 어떤 새만금 어민들은 그런 호소를 하다가 울먹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귀 기울여 듣지도 않는다. 한쪽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경제 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약육강식의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고, 농민들은 피땀 흘려 지은 볏단을 태우다 농약을 먹고 목숨을 끊기도 했고, 바로 그들을 대변하겠다고 언약한 ‘두루마기 국회의원’ 한 분은 목숨을 걸고 단식농성을 했다. 이런 와중인지라 그런지 새만금 어민들의 소박하고 눈물겨운 요구는 누구의 귀에도 가 닿지 않는다. 아마 새만금은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광고 때문인지 ‘새만금 개발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부추기는 거대언론만 접하던 시민들은 ‘끝난 새만금’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짜증을 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새만금은 끝났을까.

효력없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새만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이 광기어린 국민사기극을 끝내고 갯벌을 되살릴 수도 있다. 왜 단군 이래 가장 큰 규모의 국책사업이라는 새만금 사업이 미증유의 국민사기극인가. 여의도 면적의 140배가 된다는 새만금 갯벌을 노는 땅, 그저 때맞춰 철새나 날아오는 ‘젖은 땅’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은 박정희 개발시대부터였다. 시멘트로 방조제 쌓고 산을 허물어 젖은 땅을 메우면 마른 새 땅이 생기고, 그러면 거기 농사짓겠다는 게 개발시대의 단세포적 상상력이었다. 상상력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무지막지하고 오만한 자연관이었다. 그때만 해도 인구는 늘어날 것이라 갯벌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나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자원보다 논을 만들어 쌀을 생산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무엇인가 쫓기듯 이상한 열기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라 책상 위에서 지도를 보고 부안에서 군산까지 직선으로 금을 긋다보니 충분히 발상할 수 있었던 원대한 계획이었다고도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 나라 초기 개발시대의 무지막지한 발상이 그 가상한 개발의지 때문에 모두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 살 만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바른 시각이 잡히고, 국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갯벌가치에 대해 새롭게 눈이 떠진 것이다.

그 자체로 갯벌은 쌀농사에 못잖은 경제적 가치를 누대에 걸쳐 사람들에게 거저 제공해왔고,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정화시키고, 그렇기 때문에 바다를 그만큼 덜 오염시키고, 그럼으로써 복잡계인 생태계를 그나마 이만큼 안정시켜왔다. 갯벌에 의지해 사는 생명체들은 지구적 차원에서도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도요새의 부리가 갯벌을 파헤치기 쉽게 뭉툭하게 진화한 일은 갯벌과 도요새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동적인 예다. 그뿐인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갯벌의 심미적 가치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얼추 열거한 이런 복잡한 가치들을 단순하게 사람 중심의 경제가치로 환산한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생돈을 들여 갯벌을 메워 챙길 이익보다 몇 백 배 크다는 게 인지의 발달로 깨닫게 된 ‘젖은 땅’의 진실이다. 하지만 이미 들인 돈 1조원이 아까워 그 끝이 안 보이는 5조원의 세금을 더 쓰겠다는 새만금 사업은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아마 단군 이래 가장 어리석은 일이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을 제외하곤 바로 이 사업일 것이다.

다른 국책사업과 마찬가지로 새만금 사업 또한 매우 정치적인 동기로 강행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유별난 특수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발상은 박정희 시대에 비롯되었지만, 시행은 이어진 신군부의 원죄 때문에 가속이 붙었다. ‘광주’의 원죄의식이 곧 새만금 개발이라는 선물로 대체된 것이다. 호남출신의 지도자 또한 책을 많이 읽은 교양인이라 “아니다”라는 생각은 있었을 테지만 자신의 정치적 기반 때문에 동강댐을 포기한 것과 같은 용기 있는 대처를 못하고 말았다. 현실주의의 비겁함이 다시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극적으로 등장한 노무현정부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가움과 기대는 표정관리를 할 판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정부는 시민사회의 턱없이 큰 기대를 이라크파병과 함께 단숨에 무너뜨렸고, ‘환경’에 관한 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오만하고 난폭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온 국민을 감동에 휩싸이게 했던 삼보일배 같은 고단위의 윤리적 호소도 이 정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2003년 부안에서 서울까지 800리 길을 땅바닥을 기어온 성직자들이 청와대 앞을 지날 때 냉수 한 잔 ‘드릴’ 여유가 없었던 ‘국민의 정부’가 그 후에 몰두한 개혁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새만금이라는 특정 환경사안을 놓고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토록 다양한 방법으로 애쓴 적이 있었던가 싶다. 단연코 없었다. 그 에너지가 참으로 아깝다. 새만금 소동으로 얻게 된 국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운동방식의 성숙함은 여전히 소득으로 남아 어떤 식으로든 재생산되겠지만, 지금도 방조제 서둘러 막으려는 사업주체가 ‘농림부’라는 것은 참으로 모욕적이다. 쌀농사를 포기하기로 작정하고,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농림부는 멀쩡한 갯벌 메워 논농사를 짓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런 당착과 기만이 어디 있을까. 새만금을 거대한 국민사기극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 해 이 땅에 새만금만큼의 논이 골프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렷이 알고 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새만금 어민들과 풀꽃세상을 비롯한 몇 환경단체들의 가냘픈 외침이 담고 있는 진실에 귀 기울이기 바란다. 전진공사 중단하고, 해수유통의 폭을 넓혀 갯벌을 살려둔 채, 이제라도 처음인 것처럼 다시 고민해 볼 일이다.


‘무위당이 그립다’는 제목의 지난 글(2005년 11월11일치)에서 인용된 김지하 시인의 회고 부분 가운데 두번째 문단 중 “길에서 만나는 아주머니, …만나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과 끊임없이 벌이는 얘기…”에서 ‘벌이는 얘기’는 원래 ‘벌이 얘기’인데 잘못 나갔습니다. 출고 과정에서 잘못 고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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