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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4 21:36 수정 : 2005.11.25 14:10

“히포크라테스 틀렸다” 사람 몸 갈라 병 원인 찾아-‘의학속 사상’ 해부병리학의 탄생 베살리우스와 모르가니

비천한 신분 이발사 몫이던 해부 16세기 베살리우스 직접 행하며 연구 돼지 해부 지식을 인간에 적용한 오류 잡아 18세기 모르가니 해부병리학 업적 청진법·방사선진단법 발전 토대 마련

의학속 사상 (7)/해부병리학의 탄생 : 베살리우스와 모르가니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병은 대체로 몸 전체의 균형·조화와 관련된 문제였다. 한의학에서는 음양의 조화 여부가,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학에서는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등 네 가지 체액의 균형 여부가 건강과 질병을 판단하는 핵심기준이었다. 이에 따라 환자의 치료도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했다. 약 체계 역시 부족한 것을 보하는 보약을 중심으로 편제된 것이 동서의학의 공통적 모습이었다. 즉 질병관과 치료술, 그리고 약물학 모두 전인적이고 전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에서 이러한 전통 의학관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8세기 들어 ‘본체론’적인 질병관이 싹트면서부터다. 즉 병은 인간(의 신체)을 구성하는 체액들 사이의 균형이 깨어진 전인적인 상태가 아니라 신체의 특정한 국소 부위에 생긴 해부병리학적인 변화(병변)라고 여겨지게 된 것이다. 18세기 중엽 이탈리아의 모르가니(1682~1771)에 의해 탄생한 ‘장기병리학’은 19세기초 프랑스의 비샤에 의해 ‘조직병리학’으로, 19세기 중엽 독일의 비르효 등에 의해 ‘세포병리학’으로 발전하였다. 16세기 베살리우스(1514~1564) 이래 발달해 온 해부학은 인간의 신체를 해체·분절화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질병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병리학, 즉 해부병리학을 탄생시켰다. 이로써 질병은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실체’가 되었고 의학은 이러한 실체를 더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발견(진단)하여 그것을 제거하거나 교정(치료)하는 방향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또한 의학관이 이렇게 분절적·분석적·객관적인 특성을 띠게 되면서 의학은 여타 과학 분야의 성과를 손쉽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과학적 의학’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모르가니는 이미 학생시절부터 유명한 발살바의 해부학 실습을 거드는 등 해부학에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였다. 그는 스물아홉의 나이에 당시 볼로냐대학과 쌍벽을 이루던 파도바대학의 이론의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네해 뒤에는 해부학 교수직을 맡게 되어 죽을 때까지 60년 가까이 해부학 연구가와 교육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의학의 교황’이라고 불린 비르효는 근대의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세 가지 요소로 동물실험, 임상관찰과 더불어 사후부검을 꼽았다. 오늘날에는 병리의사들이 행하는 부검을 통해 환자의 몸속에서 일어났던 병리적 변화를 죽은 뒤에 직접 관찰하여 최종적 진단을 내린다. 또한 사후부검 소견과 생전의 증상과 징후를 많이 모아 검토함으로써 어떤 증상과 징후를 일으키는 인자들을 파악하여 질병 진단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의학발전 밑거름된 사후부검


이러한 사후부검이 체계적으로 행해진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잠시 행해졌고, 중세 후기에 산발적으로 시행된 적이 있지만 체계를 가지고 부검이 행해진 것은 18세기 이후다. 부검의 의학적 의의를 구체적인 성과를 통해 밝힌 것이 모르가니의 중요한 업적이다. 모르가니는 700례에 이르는 부검 소견과 그 환자들 생전의 임상 소견을 연결 검토하여 1761년에 <질병의 장소와 원인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 모르가니는 매 사례에 대해 우선 환자 생전의 임상적 특성을 기술하고 난 뒤 부검에서 발견한 해부병리학적 특성을 묘사하고 둘 사이의 관련성을 규명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질병은 장기라는 국소부위에 “자리를 잡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뒤 모르가니를 따라 의사들은 ‘네 가지 체액의 부조화’가 아니라 ‘병든 장기’를 통해 환자의 증상을 설명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병변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거듭하여 타진법(1761년), 청진법(1819년), 방사선진단법(1895년) 등의 새로운 진단방법이 개발되었다.

‘병든 장기’로 환자 증상 설명

베실리우스의 해부도.
모르가니는 질병의 자리를 장기라고 하였지만, 19세기초 비샤는 조직으로 질병 자리의 범위를 좁혔으며 19세기 중엽에는 비르효 등에 의해 세포가 질병의 장소로 등장하게 된다. 모르가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보인, 질병의 구체적인 자리를 찾으려는 국소병리학(해부병리학)은 히포크라테스 이래 2천년 넘게 주도권을 가졌던 체액병리학의 지위를 넘겨받게 되었으며, 그것은 19세기 후반에 확립된 세균병인설 등의 특정병인론과 더불어 현대의학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모르가니의 업적이 가능했던 것은 앞서 인체해부학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고대의 갈레노스는 동물 해부를 토대로 하여 인체의 구조를 유추하였으며 중세말부터는 인체 해부가 허용되기 시작하였지만 갈레노스 이래 해부학 지식에는 별다른 발전이나 변화가 없었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저자 스스로 직접 행한 인체 해부에 근거하고 새로운 인쇄술로 펴낸 첫번째 해부학 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동물을 해부하기 즐겼던 베살리우스는 파리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동물과 인체를 해부하였다. 그는 의학사 학위를 받은 뒤 당시 의학의 중심인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으로 가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537년 외과 및 해부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그 뒤 몇해 동안의 준비를 거쳐 1543년 스위스 바젤에서 일곱 권으로 된 해부학 책을 출간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1543년은 중세적 우주관을 무너뜨리고 근대적인 우주세계관을 세우는 데 밑받침이 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들의 회전 운동에 관하여>가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우연이지만 천문학과 인간학에 대한 근대적 과학혁명의 출발은 바로 이 해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사체 해부 등 손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경멸하는, 대학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의사들의 행위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위험에 대하여 언급했다. 또 사람 대신 원숭이, 돼지 등을 해부하고 그 결과를 망설임 없이 인체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생겼던 갈레노스의 오류, 예컨대 다섯 엽의 간, 일곱 조각의 흉골, 뿔 모양의 자궁 등을 자기 스스로의 관찰을 통해 교정하였다.

인체해부로 갈레노스 오류 밝혀

파리대학 시절 스승인 실비우스를 비롯하여 많은 의사들이 베살리우스를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은 천년이 넘도록 도전받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이 신봉해마지 않던 갈레노스에 대해 감히 그 오류를 지적한 베살리우스의 자세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비우스도 불경스런 제자의 오류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를 얻고자 제자의 방법을 따라 직접 해부하고 관찰한 결과 갈레노스의 여러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잘못들은 물론 인체 해부를 할 수 없었던 갈레노스가 원숭이와 돼지 등 동물 해부에서 관찰한 사실들을 인체에 확장 적용함으로써 생긴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갈레노스의 절대적 추종자였던 실비우스는 차마 갈레노스의 오류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갈레노스 이후 천몇백년 사이에 사람의 구조가 변했다는 천재적인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의사인 해부학 교수가 자기 손으로 직접 해부하고 눈으로 관찰한 결과를 묘사하는 것은 그 무렵까지는 이단적인 행위였다. 해부를 하는 것은 당시로는 비천한 신분인 이발사 외과의의 몫이었다. 결국 베살리우스는 당시의 정상적인 규범에서 일탈한 행동을 통해 새로운 의학의 시대를 연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장인적 전통과 (철)학자적 전통이 만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문이 열리는 근대 과학혁명기의 특징이 의학과 해부학에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황상익 서울의대 교수·의학사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을 하루아침에 혼자 힘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학문적 성취는 거의 없었지만 베살리우스 이전 몇 백년 동안 많은 사체 해부 행위가 있었다. 당시 뛰어난 외과의사였던 베렌가리우스는 100구 이상의 주검을 해부하여 1521년에 인체해부도를 만듦으로써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혁명을 예고하였다. 죽은 지 200년이 넘어서야 공개되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많은 시체 해부를 하여 다수의 해부도를 남긴 것도 베살리우스 직전의 일이었다.

hwangsi@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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