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1 20:26
수정 : 2005.12.0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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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루이기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지음. 이정호 옮김. 지호 펴냄.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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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유전학·언어학 통해
인간 진화의 실체 추적한
저명 유전학자 연구결정판
인간은 언제 어디서 진화했나? 인간사회는 어떻게 여러 대륙에 흩어져 번성하게 됐나? 인간의 다양성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다양성을 생성하는 데 작동하는 힘들은 어떤 것들인가? 다양성 생성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경로는 어떠한가? 유전 외에 문화와 기술의 발전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 인간의 유전적 특성과 언어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인간 진화의 역사는 어떠했고 인간 진화를 추동하고 방향지은 인자들은 어떤 것들인가?
완전한 현대 인간과 같은 뇌용량을 지닌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이 나타난 것은 약 10만 년 전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였다. 주로 모계로만 유전되는 세포내 미토콘드리아 DNA와 부계의 Y염색체 연구를 통해, 이들 ‘아프리카 이브’와 아담의 후예들은 먼저 아시아로 이동했고 거기서 일부는 오스트레일리아쪽으로, 일부는 유럽쪽으로 갔으며, 또 한 갈래는 얼어붙은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태생의 저명한 인간집단유전학자 카발리-스포르차 교수(미 스탠퍼드대학 유전학과)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지호 펴냄)는 이렇듯 인간집단의 진화와 이주 과정을 해명하고 현생 인류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생물학뿐만 아니라 고고학과 인류학, 문화사, 언어학 등도 적극 활용하는 다학제적 접근을 시도한다. 1980년대 말부터 세계적인 규모로 시작된 인간유전체 연구사업(인간 게놈 프로젝트)이 쏟아내고 있는 최신 성과들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유전학의 최근 연구들이 종합적이고 학제간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은 40여 년에 걸친 카발리-스포르차 교수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아마도 20세기 생물학의 가장 위대한 종합자인 저자의 과학적 사고방식과 지적인 스타일을 형성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사이언스>)
카발리-스포르차 교수에 따르면, 기후와 풍토 등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표피적인 변이를 보여줄 뿐인 인종간의 신체적 차이, 전통이나 선호도 등 문화적 차이를 근거로 한 인종 분류나 차별은 무지와 맹목일 뿐이다. 생물수학자들과 오랫동안 이론적·수학적 집단유전학을 연구해온 그가 보기에 “유럽인들은 3분의 2는 아시아인이고, 3분의 1은 아프리카인이다.” 또 “미국의 경우 백인과 흑인 유전자 혼합이 북부에서는 거의 50%, 남부에서는 10%, 전체적으로 평균 30%에 이른다.” 주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날조하고 아류 국수주의자들이 집착하는 ‘인종적 순수성’이라는 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만들어낼 수도 없으며, 설사 근친교배를 거듭해 억지로 만들어낸다하더라도 그것은 몰락을 자초하는 길이다.
유전학 분야의 또 다른 기념비적 대작 <인간 유전자들의 역사와 지리학>의 저자이기도 한 카발리-스포르차 교수의 이 책을 거의 5년간이나 애쓴 끝에 우리 말로 옮긴 사람은 이정호 고려대 생명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다. 이 선임연구원은 영국 노팅엄대학에서 ‘인간 티박스(T-box) 유전자 무리의 분자유전학’이라는 논문으로 인간분자유전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다. 그는 원제
의 popoli(people)를 ‘민족’으로 번역해야 할지, ‘사람’으로 해야 할지를 고민할 만큼 과학언어의 주체적 수용(번역)문제를 깊이 생각하면서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인 미국 교수 카발리-스포르차 교수가 콜레주 드 파랑스에서 한 특별강연록을 기초로 한 이 책이 “인간의 유전적 다양성 영구에서 통용되는 이론적 ‘언어’들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가 보기에 한국은 세계의 앞서가는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대의 유전학자, 유전체학자를 길러내는 데는 학부·대학원 불문하고 아직도 황무지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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