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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1 21:57 수정 : 2005.12.02 13:58

자신이 발명한 청진기로 환자의 증상을 살피고 있는 라에네크의 모습을 그린 그림. 아우엔브루거의 타진법 발명 이후 등장한 청진기는 개선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같은 청진기로 발전해 임상의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기에 이른다.

환자 오줌으로 병 원인 찾던 중세 의학
어떻게 과학적 의학으로 바뀌었을까
질병 증상 관찰해 체계적 분류한 시드넘
타진법 발명한 아우엔브루거
현대 임상의학 이어지는 두 흐름 원류 돼

의학속 사상 (8)/근대 임상의학의 사유양식:시든햄과 아우엔브루거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간다. 우리가 먹고 입고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그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다. 병이 생기면 당연히 현대과학의 총화인 병원에 간다. 병원에서는 우리의 몸을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소리를 들어보고 피를 뽑거나 사진을 찍어 몸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 다음 수술을 하거나 약을 써서 그 원인을 ‘제거’한다.

하지만 의학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의 의사들이 했던 진료행위에 빠져들다 보면, 이와 같은 우리의 일상이 무척 새롭게 느껴진다. 중세 서양의 의사들은 몸속에 담겨져 있거나 밖으로 분비되는 액체의 상태에서 병의 원인을 찾았으며 치료 또한 그 액체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이었다. 진단은 주로 환자의 오줌을 유리병에 담아 눈으로 관찰하고 손에 묻혀 비벼보고 맛을 보거나 하여 몸의 상태를 ‘추론’하는 것이었으며, 치료는 그러한 추론에 의거하여 지나치게 많은 체액(혈액, 점액, 흑담즙, 황담즙)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양의 피를 뽑아내고 약을 써서 먹은 음식을 토해내게 하며 이뇨제나 하제를 쓰거나 관장을 하여 찌꺼기 액체를 제거하는 등이 일상적 의료행위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전근대적 의학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과학적 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둘 사이에는 수많은 징검다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17세기 이후에 마련된 두 가지 계기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한다. 놀랍게도 그 계기 중 하나는 시대를 거슬러 고대의 히포크라테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중세와 근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대와의 대화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새롭게 탄생한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가 아닌 17세기 영국의 시대정신과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리는 토머스 시든햄(1624~1689)은 청교도 혁명에 가담한 의회군의 장교였으며 당시의 대 철학자 존 로크와 화학자 보일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점에서, 다양한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즐비한 거리에서 소피스트들이 격론을 벌이는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와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를 히포크라테스로 부르는 것은 굳어진 이론에 빠지지 않고 질병현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경험을 의학의 중심에 두었으며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학은 중세적 도그마와의 단절인 동시에 고대 그리스와의 대화였으며 과학적 임상의학의 출발이었다.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려

그렇다고 그가 아무런 생각 없이 관찰과 경험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현대의 과학철학이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떠한 관찰도 이론과 독립적일 수는 없다. 시든햄의 의학을 하나의 사상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가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의 친구였다는 사실이 하나의 열쇠가 된다. 시든햄 의학사상의 핵심은, 각각의 질병은 자연 속에서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는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의 의학방법론은 이러한 질병의 자연사를 면밀히 관찰하여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동식물에 서로를 구분하는 종(species)의 구분이 있듯이 각각의 질병에는 다른 것과 구분되는 나름대로의 특징(증상과 경과)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그를 질병분류학(nosology)으로 이끈다. 이렇게 그는 질병의 증상과 경과를 자세히 관찰하여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기록이 600쪽짜리 8권에 이른다고 한다. 정확한 관찰을 통해 증례를 기록하고 유사한 증례들을 묶어 유형을 구분한 다음 증례와 증례, 유형과 유형을 비교 검토하여 질병분류의 체계를 완성해 간다. 부검을 통해 질병의 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이 빠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질병분류와 거의 일치한다.

질병의 기후조건까지 분류

초기의 청진기
그의 관찰은 질병의 증상과 경과에만 머물지 않고 기후와 풍토에까지 확장되는데 이것 또한 그가 영국의 히포크라테스라 불리는 이유 중 하나다. 그는 런던에서 몇 년 동안이나 열병의 발병 양상과 기후를 관찰하여 어떤 해 어떤 계절에 어떤 유형의 열병이 발생했으며 당시의 기후는 어떠했는지를 자세히 기록한 다음 평균적 기후와 비교 검토하여 ‘전염병의 구성’(epidemic constitution)이라는 학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질병을 증상과 경과에 따라 분류할 뿐 아니라 그 질병을 일으킨 기후조건까지 일정한 유형으로 분류해 내는 것이다. 질병의 결과뿐 아니라 그 원인마저도 분류의 대상이 된다. 지금의 원인-결과 분석과 다른 점은 그것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은 공기나 물속에 떠다니는 미생물이 전염병의 원인이지만 시든햄에게는 그 매개체인 공기나 물 등이 가진 속성들의 집합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시든햄의 의학은 질병으로 하여금, 그리고 기후조건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한 다음 그것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류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근대 임상의학의 탄생에 필요한 굳건한 방법적 토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임상의학의 자연주의적 흐름의 본류인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던 선구적 의학자들은 근대 임상의학의 또 다른 흐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질병이 하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여유와 아량이 없었다. 그래서 질병을 담고 있는 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어떻게 몸을 심문한단 말인가? 살아 있는 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열어봄으로써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 앓던 병의 자리를 찾아내고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무턱대고 열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아있는 몸과 소통하는 언어

그래서 살아 있는 몸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발명되는데 그것은 그 몸을 살짝 두드려 소리를 듣는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히 여겨지는 타진법이 발명된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선구자들이 그렇듯이 이 방법을 처음 사용한 레오폴드 아우엔부르거(1722~1809)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방법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쯤 나폴레옹의 주치의였던 코르비자르에 의해 본격적으로 임상에 도입되지만 약 반세기 동안 망각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반세기가 근대 임상의학의 또 다른 흐름이 나타나는 시기라고 보면 되는데 그 무대는 런던이 아닌 파리였다. 그것도 개업의의 진료소가 아닌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원에서였다. 파리의 병원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의사들은 그 죽은 몸을 열어 질병의 자리를 찾아내고 원인을 규명할 수 있었다. 죽은 몸을 열어젖히자 살아 있는 몸에게도 뭔가 물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타진법이 재발견될 수 있는 사상적 토양이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간단한 진단법이나 치료법이라도 그것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오랜 사상적 단련기간이 필요하다는 의학사의 많은 사례 중 하나다.

이러한 생각의 전환으로 인해 이제 의사들은 몸을 만지고 두드리고 소리를 듣는 등의 임상의학적 방법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강신익/인제대 교수·의철학
이후 라에네크(1781~1826)에 의해 아주 간단한 원리의 청진기가 발명되었고 개선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같은 청진기가 탄생하여 임상의사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기에 이른다. 이후 현대의학은 방사선이나 내시경과 같은 수많은 관찰도구들을 발명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그 출발은 이렇게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렇게 해서 면밀한 관찰과 분류를 위주로 하면서 ‘질병’과 대화하는 자연주의적 흐름과 질병의 담지체인 몸에 대한 탐색과 개입을 위주로 하면서 ‘몸’과 대화하는 현대 임상의학의 두 흐름이 완성된다. 시든햄과 아우엔부르거는 그 두 흐름의 원류라 할 수 있다. philomedi@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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