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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8 17:03 수정 : 2005.12.09 14:04

역사로 보는 한주

1937년 12월13일 침략자 일본군이 중국 난징을 함락한 뒤 6주일간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다수의 비전투원 민간인을 포함한 3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학살은 있었으나 그 수는 수천에서 수만명을 넘지 않는다는 주장과 아예 학살 따위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일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세상에 알려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한국인들 중에도 적지않은 독자가 있는 <문예춘추>, 그리고 <산케이신문>과 산케이 출판 등은 참으로 집요하게도 그 한쪽 주장을 끊임없이 되살려내고 있다. 그리하여 저들은 그 만행을 하루빨리 망각의 저편으로 흘려보내고 싶은 자신들의 뜻과는 반대로 계속 논쟁 자체를 되살려내고 이웃을 자극하면서 근대일본이 저지른 치명적인 과오를 스스로 들쑤셔내고 있다.

1937년 7월7일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이른바 중-일전쟁이 시작됐으나 31년 봉천 교외 유조구의 만철 폭파사건을 기화로 한 만주침략 이래 일본의 중국침략은 계속됐으며, 36년 12월12일 장쉐량(장학량)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 내전을 멈추고 항일전쟁에 힘을 합치도록 요구한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내전은 사치였다. 일제 침략은 내전을 담아낼 중국이라는 그릇 자체를 박살내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일본군은 상하이와 소주, 무석, 가흥, 항주, 소주, 상주 등을 휩쓸며 군인은 물론 포로와 일반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약탈했다. 빼앗고, 죽이고, 불태우는 ‘삼광작전’이 그런 것이었다. 그 사정은 중국인 및 외국인들의 증언과, 드물지만 일본군 병사나 장교들의 종군일기나 회고록 등을 통해 확인됐다. 도쿄 국제전범재판에서 당시 중지나방면군사령관이었던 육군대장 마쓰이 이와네 등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집행된 것도 ‘난징 학살’로 상징되는 일본군의 중국인 대량살륙 때문이었다. 사카모토 요시카즈 도쿄대 명예교수 등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조차 일제의 침략에 따른 중국인 희생자가 3-4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그것이 이른바 중-일간 ‘15년 전쟁’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비극의 핵이다.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자들의 유력한 논리 가운데 하나는 게릴라전을 펼친 중국인 저항세력을 도륙한 것은 학살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국제법상 게릴라전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행위자 처벌은 정당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낯간지럽다. 서방이 제국주의침탈을 자신들이 만든 국제법이란 잣대로 정당화한 수법을 흉내낸 것이다. 일제의 중국과 조선 침략은 국제법상 합법이고 피어린 항일투쟁은 국제법상 모두 불법이니 도리어 사죄하란 얘긴가? 오늘날 ‘야스쿠니 참배’에 집착하는 일본 주류 지배그룹의 생각이 그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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