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데뷔 앨범을 낸 이래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록그룹 ‘븍랙홀’. 사진 소니비엠지 제공
|
록그룹과 사회주의 이념은 같다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
그룹 블랙홀은 20년 가까이 활동
그 당당한 꾸준함이 좋다
댓글 민족주의 시류에 속상한 이는 들어보기를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락그룹 ‘블랙홀’
한국에서 락 음악을 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일에 속한다. 헤비 메틀을 한다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주의할 것은 메탈이 아니라 메틀이라는 것이다. 디지탈이나 디지털이 아니라 디지틀이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영어 발음에 우리 모국어의 발성 구조가 간섭하듯이, ‘롹’을 하는 데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구조적 조건이 간섭을 하고 제약을 가한다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은 신중현이 이끈 4인조 그룹 ‘에드 훠(The Add 4)'의 데뷔 앨범 <비속의 여인>(1964)이라고 한다. 연주와 노래는 물론이고 작곡과 편곡의 면에서도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룹 스스로 모든 것을 했다”는 점에서 최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락’ 음악의 초창기에는 ‘에드 훠’, 그러니까 ‘애드 포’ 말고도 ‘키 보이스’와 ‘코끼리 브라더스’도 활동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사이에 누가 원조냐 하는 것은 논쟁 거리에 속한다.
뽕짝과 어울려 ‘트로트 메틀’로
그런데, ’키 보이스‘의 유명한 노래 <해변으로 가요>(1970)는 상당 기간 동안 김희갑 작사, 작곡으로 알려져 왔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키 보이스 작사, 작곡으로 정정되기도 했었는데, 얼마 전에 그렇지 않다는 게 밝혀졌다. 소설가 이호철이 가사를 번역한 이 노래는 원래 8인조 일본 그룹의 것이었고 이 그룹을 이끌던 한국계 일본인이 작사,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뭐, 이것만은 아니다. 중딩이 시절의 내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불러제끼곤 했던 신중현의 <미인>도 그 기타 전주 부분이 알고 보면 지미 헨드릭스의 ‘Voodoo Chile(부두 칠레)’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중현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마찬가지로 그 기원이야 어떻든 간에 내 몸에 <해변으로 가요>는 한국 가요로 새겨져 있다. 달리, 이미 1970년대 후반에 <부루 라이또 요코하마>는 그 쓰임새에 있어서 더 이상 일본 노래가 아니었다.
‘트로트 메틀’이라는 괴상한 용어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서구 락 음악의 다소간에 본원적인 듯한 장르적 성격들은 한국에서 특유의 ‘뽕’양식 안으로 용해되거나 흡수되어 왔다. 이렇게 키취적이고 혼성적인 제약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락 음악은 1980년대 중반에서 활짝 꽃피게 된다. 이 땅의 ‘롸커’들이 끊임없이 ‘롹’의 ‘진정성’을 추구해 온 노력의 결과였다. ‘시나위’ ‘부활’ ‘백두산’과 같은 락 그룹이 한꺼번에 등장해서는 1986년에 첫 앨범들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그룹의 기타리스트 신대철, 김태원, 김도균은 신중현, ‘산울림’, 김수철, ‘들국화’ 등과 더불어 한국 락 음악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재범, 김종서, 서태지 등은 이들 세 그룹과 관계가 깊다.
한국 락 음악 중흥의 역사도 1986년부터 꼽아서 올해로 20년이다. 어떤 점에서는 광복 60주년보다 값지다. 또, 한국 락의 역사에서 1986년의 르네상스는 소위 정치적 민주화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87년 체제’에 못하지 않다. 중흥기 이후의 한국 락 음악은 민노총 10년의 두 배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것이다. 이승철이 한때 몸담았던 그룹 ‘부활’은 올 여름에 10집 앨범 <서정>을 냈고, 수능 성적 발표 하루 전날에 20주년 기념 공연을 할 예정이다.
임재범이 시나위에 남았더라면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본디 락 그룹과 사회주의는 그 이념이 같다. 그 공통 이념은 ‘모두가 하나를 위해서, 하나는 모두를 위해서’로 요약된다. 흔히 우리는 락 그룹을 리더라든가 리드 보컬의 이름을 통해 기억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락 그룹이 내부 주도권 다툼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해체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념의 관철이 필요하다. ‘딥 퍼플’의
|
이재현/작가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