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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8 18:05 수정 : 2005.12.09 14:03

세 명의 사기꾼
스피노자의 정신 지음. 성귀수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1만원

“신과 종교는 대중의 공포와 무지에 기대어 자기들만의 특수이익 위한 대중 농락 가공물” 인격신 부정했다 파문당하고 암살위협 시달렸던 스피노자와 관련성 추측할 뿐 아직도 지은이 몰라

<세명의 사기꾼>이라는 책 이름은 원래 정식 제목이 아니었다. 저자로 돼 있는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것도 실존인물의 이름이 아니다. 이렇게 실제 이름을 감추는 이유는, 드러날 경우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명의 사기꾼’이 다름아닌 모세, 예수, 마호메트를 가리키고, 시대가 절대왕정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유럽의 17세기 말-18세기 중엽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동시대라 할 수 있는 1632년에 태어나 1677년에 타계한 스피노자가 분노하고 기뻐하는 인격신을 부정하고 범신론적 세계관을 가졌다는 이유로 생전에 유대교에서 파문당하고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사후 1백년이 지나도록 그의 철학이 매장당해야 했던 세상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곧 다가올 프랑스 대혁명의 폭발을 향해 자유사상이 꿈틀대던 불온한 시대이기도 했다.

<세명의 사기꾼>은 그 시대에 극히 제한된 지식인 그룹을 중심으로, 출판된 책이 아니라 비밀리에 필사된 수사본 형태로 검열을 피해 급속도로 퍼져 전유럽을 들쑤셔 놓고 있던 신성모독적인 지하 ‘괴문서’에 붙여진 통칭이었다. 이 괴문서가 처음으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책으로 정식 출간된 것은 1712년이었고, 그때는 <스피노자의 정신>이 제목으로 달렸다. 70권 한정본이었다. 이번에 번역된 책은 그로부터 9년이 더 지난 1721년에 재판을 찍으면서 수정하고 보완한 텍스트다.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모두 조롱

이 책이 그토록 유럽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제목이 말해주듯, 오랜 세월 유럽을 지배해온 기독교를 비롯해 유대교와 이슬람교, 즉 중동에서 일어난 주요 고등종교들의 신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비아냥댈 뿐 아니라 세속적 돈과 권력을 위해 무지한 대중을 속이는 추악한 사기행위라고 거침없이 몰아갔기 때문이다. 지금 봐도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어보이는 치밀한 논리와 박식을 자랑하며, 매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종교를 옹호하는 자들은 종교적 반론들에 대해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무시의 태도로 일관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처럼 무시할 만한 반론들이 담긴 책자들을 아예 없애버리도록 더할나위 없이 호들갑스럽게 요청한다. 솔직히 이러한 행동방식은 자기들이 옹호하는 입장에 해가 될 뿐이다. 정녕 그들이 종교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게까지 억지스럽게 옹호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너져내릴까봐 걱정하겠는가? …그보다는 오로지 진실 자체의 힘에만 의존하려 하지 않을까? 아울러 승리를 확신하기에 오류에 맞서는 정정당당한 싸움에 기꺼이 나서지 않겠는가?”

책은 이처럼 자신만만하게도, 신이나 종교는 대중의 공포와 무지에 기대어, 자기들만의 특수한 이익을 위해 대중을 농락하는 자들이 거짓과 요설로 만들어낸 가공물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과 똑같이 생기고 사랑과 질투, 증오와 기쁨, 슬픔, 두려움, 복수심 따위를 지닌 신이라는 게 얼마나 조잡하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놓고 본 사람들이 있다는 건 또 무슨 얘기냐, 잘못을 벌하지 않는다고도 하고 재앙을 내린다고도 하고, 일관성이 없다!


“자연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으며, 궁극의 원인이라는 것도 인간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두고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신이 현재로서는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신으로서 어떤 행위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한 시기가 있고, 언제든 그 이유가 생기면 일련의 행위를 바라게끔 된다는 얘긴데, 이는 곧 신을 매우 빈약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처사다.” 전지전능하고 완벽하다는 신이 어째서 이뤄야 할 어떤 목적을 설정할 만큼 결핍될 수 있으며, 어떻게 불완전하고 추한 존재들로 세상을 채우고, 끝없는 수행과 그토록 잔인한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가? “<성서>라는 책은 사실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옛날이야기들로 그득할 따름이다.”

“인간이 구더기보다 나을 것도 없어”

대천사 가브리엘과 마호메트의 만남. 마호메트는 예수와는 달리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법이 뻗어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세 명의 사기꾼>에서
“요컨대, 모세는 종족의 아버지가 아니라 압제자였을 뿐”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철학자나 지식인들을 자기 사도로 절대 임명하지 않은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며” “오로지 지력이 박약한 자들과 단순한 사람들, 어리석은 자들만을 받아들였던 것”은 당연했다. 성서의 많은 구절들은 플라톤과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에픽테토스, 에피쿠로스 등이 남긴 고대 전적이나 설화들에서 따온 것들이다.마호메트는 “사기꾼”이었다.

이런 언설에 유럽이 긴장할 만도 했겠다. 이 익명의 저자는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은 극히 단순한 존재이거나 무한정한 외연 그 자체로서 자신 안에 포함되는 모든 것과 닮아 있다. 말하자면 그냥 물질 자체가 되겠는데, 결코 정의롭지도 자비롭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질투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결론적으로 벌을 내리는 존재도 보상을 해주는 존재도 아니다. …지적 사고과정과 상상력의 농간을 혼동하지 않을 만큼 이지력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자들, 그릇된 교육에 의한 선입관들을 과감하게 떨쳐낼 수 있는 사람들은 신에 대해 건전하고 명쾌한 개념을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다. 이들은 신을, 그것이 아무 차별없이 만들어내는 모든 존재들의 근원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그 모든 존재들은 신이 보기에 어느 하나라도 다른 하나보다 결코 낫거나 못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 해도, 신이 만들어낼 때 구더기 한 마리나 한 송이 꽃보다 더 각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평생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렌즈 깎기를 생업으로 삼았던 유물론적 범신론자 스피노자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써낸 <신학정치론>에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설파하면서 “국가의 목적은 자유”라며 교회의 지나친 간섭을 막고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세상으로부터 매장당했다. 이 책의 저자가 스피노자일 가능성은 별로 없고 다른 수많은 유명인들이 실제저자로 거론됐지만, ’스피노자의 정신’이라고 달아놓은 건 그럴듯해뵌다.

300여년 전에 나온 이 책이 신앙인들로선 영 탐탁치않을지 모르겠으나, 저자의 주장대로 “정녕 (신과) 종교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별 대수겠는가. 세상이 어떻게 굴러왔는지 성찰의 기회도 되겠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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