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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8 19:41 수정 : 2005.12.09 13:57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죽은 소와 덜탄 주검, 오물이 떠다니지만 ‘갠지스강이 오염됐다’하면 화내는 인도인들 ‘어머니 강가가 아프다’고 말해야 수긍한다 우리도 ‘산천이 아프다’고 말하면 공감할까?

녹색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수년 전, 나는 겨우 40대 후반의 나이였건만 젊었을 때 만난 한 제자의 부탁으로 주례를 선 적이 있었다. 제자의 신랑은 더욱이 중학후배였다. 그들은 결혼식 직후 인도 바라나시에서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그들에게서 한번쯤 다녀가시라는 연락이 왔다. 그냥 안부 인사였건만, 이때다 하는 심사로 앞 뒤 안 가리고 몇 지인들과 함께 바라나시를 다녀왔다.

자주 들락거리던 북인도 히말라야와 달리 바라나시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3천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현존한다고 일컬어지는 고도(古都) 바라나시는 외양으로는 몇 해 전과 하나도 안 변했다. 먼지와 소음, 지독한 혼잡, 길바닥의 쇠똥과 개똥, 사원 지붕 위의 사나운 원숭이, 힌두 상류층의 거만한 눈빛과 불가촉 천민(언터처블)의 시커먼 맨발, 상인들의 호객과 마약 밀매상, 바라나시 비단장사들의 바가지와 숨을 거두자 흰 천에 씌워져 화장터로 흘러가는 시체들, 그리고 갠지스 강가 화장터에서 하루 종일 치솟는 연기가 바로 그랬다.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특히 인도에 대해 바로 보고 제대로 말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빅토리아 왕조 때의 영국 제국주의자들처럼 그들을 ‘불결한 야만인’이라고 쉽게 말하는 오리엔탈리즘도 무지와 오만의 극치지만, 인도에 관한 몇 권의 중요한 책을 펴낸 적 있는 이옥순 교수가 파헤친 ‘복제 오리엔탈리즘’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이방인의 자세라 할 것이다.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란 주로 우리나라 ‘인도전문 작가들’이 한결같이 드러내곤 했던 공통된 한계, 즉 같은 ‘동양’인 우리가 ‘다른 동양’인 인도를 보고 말하는 편향된 시선을 뜻한다. 인디라간디 공항의 벽에 커다랗게 써붙인 ‘놀랄 만한 인도(Incredible India)’라는 표어는 인도인 스스로가 설정한 인도관인데, 그런 말에 현혹되어서도 곤란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신을 빼놓는 혼잡과 도처에서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열악하기 그지없는 삶의 외양과는 별도로 인도는 한국처럼 아이티산업의 선두주자이고, 독립 직후부터 핵을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문화의 영향권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는 독자적인 대륙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족이지만, 필자에게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가 아니라 언제나 ‘닥터 암베드카르’의 인도로 떠오르곤 한다. 간디와 같은 시대, 언터처블로 태어나 당대 인도인 중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서 평생 카스트 제도에 저항한 암베드카르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큼이나 살인적인 카스트제도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고, 그를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던 큰 사람이었다. 갠지스 강가 메인 가트(사원의 계단)에서 초저녁이면 일년 삼백육십오일 벌어지는 뿌자의식(힌두 종교의식)은 전보다 더 요란해졌고 더 장식적이 되었지만, 그 의식에 언터처블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누 법전에 언터처블이 경전 읊는 소리를 행여 들을라치면 귀에 끓인 납을 부으라고 적혀 있다니, 암베드카르가 마누 법전을 태우고 불교도로 개종함으로써 그 엄혹한 신분사회로부터 탈출했던 게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바라나시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거기 사람들이 ‘강가(Ganga)’라 부르고, 지도에는 갠지스 강이라 적혀 있는 강 가장자리의 돌계단에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게 된다. 힌두들에게 갠지스강은 매일같이 짓는 죄를 씻고, 그렇게 살다 죽은 뒤 태운 재도 바로 그 어머니 강에 뿌려야 회귀하지 않는다는 강고한 믿음의 강이다. 거기 날씨로 초겨울이었지만 수천 명의 힌두교도들이 7㎞나 이어진 가트 앞 강물에 들어가 침례(浸禮)를 한다. 문제는 언제나 물의 상태였다. 몸을 물에 담은 채 그 똥물로 양치도 하는데, 물의 상태가 육안으로 봐도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더러 죽은 소가 떠내려오고, 사람과 짐승들의 오물이 뒤섞여 있고, 가난한 주검의 경우지만 장작이 모자라 덜 탄 시체토막들이 강 위에 둥둥 떠 있건만 힌두교도들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충격적인 아침풍경에 곧 떠날 이방인이지만, 거의 질릴 지경이었다.

아무리 종교적 믿음이 강물의 오염을 덮어버리는 문화라 하더라도 여긴들 이 강물의 상태에 대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없을까? 이번에도 열심히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갠지스강을 정화시키려는 시민단체가 있었다. 툴시가트에 있는 선껏 모천 재단(Sankat Mochan Fondation)이 그 패들이었다. 1982년에 설립된 선껏 모천 재단은 ‘위대한 어머니가 다시 숨쉬게 하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강으로 흐르는 22개 하수구 중 4군데씩 번갈아 한달에 1회씩 수질검사를 하고 있었다. 검사 결과 기도처 언저리 물에 용존산소는 이미 없고, 샘플 100㎖당 150만개의 배설물 대장균이 발견되었다. 실무자 라지시 꾸마르 미시러(40)에 의하면, 화장터로 인한 오염은 10%, 생활하수 오염이 90%에 달하는데 갈수록 오염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했다. 돈 들여 전기화장터를 만들었지만 시민들이 이용을 안 해 전력소모만 늘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놀라운 일은 이들이 환경운동을 펼치는 표현방식이었다.


“강이 오염되었다고 하면 시민들이 몹시 화를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강가가 아프답니다. 어머니 강가가 우리들 때문에 병들어가요.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라고 말하지요.”

미시러의 말이었다. 수질검사 결과 따위로는 3천년도 더 된 갠지스강에 대한 힌두신앙이 끄덕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에는 모두들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수긍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이어 말했다.

“그렇지만 깊은 강에는 여전히 민물 돌고래가 살고 있습니다. 돌고래가 바로 이 강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근거지요.”

얼마간의 기부금을 전달하면서 “여러분들이 바로 말하는 돌고래들이기도 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한때는 우리도 ‘산에 든다’고 말했으며 산신령의 존재를 믿었고, 큰 나무의 정령을 믿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강물을 어머니라 여기는 힌두교도들과 오늘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산천이 아파요”라는 말에 우리는 바라나시 시민들만큼 공감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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