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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8 19:51 수정 : 2005.12.09 13:57

영국의 외과의사 제너가 소들만 걸리는 질병인 우두 균을 팔에 접종함으로써 천연두를 예방하는 종두법을 아이에게 시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고대 중국·인도서 ‘콧구멍’ 예방법 개발 아랍인들 칼로 상처내 균 넣는 인두법 영국으로 넘어와 우두법으로 거듭나 동서양 의학 구분 불필요 보여주는 사례 다른 동물종 넘나드는 질병 연구 계기도


의학속 사상/⑨ 제너와 종두법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질병과의 전쟁에서 인간은 여전히 열세이고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한 정복을 선언한 유일한 질병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천연두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천연두의 근절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인류는 비로소 이 무서운 질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이었다. 천연두는 오랫동안 모든 인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질병에 걸리면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앓으며 고열, 두통, 요통, 구토 등에 시달린다. 사나흘 지나면 붉은 반점이 피부에 나타나기 시작해 며칠 안에 고름으로 가득 찬 농포로 바뀐다. 이 병변은 대부분 얼굴에 생기지만 눈까지 침범하기도 한다. 환자가 살아남으면 딱지가 형성되었다가 다음 몇주 안에 떨어지면서 흉터를 남기게 된다.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20~40퍼센트가 사망하며 살아남은 사람도 얼굴이 얽어 흉하게 외모가 변하거나 눈을 침범한 경우는 그로 인해 눈이 멀기도 한다. 17, 18세기 동안 전체 런던 인구의 3분의 1이 천연두의 흉터를 갖고 있었으며 눈이 먼 사람의 3분의 2가 천연두로 인해 시력을 잃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과 2, 30년 전까지만 해도 천연두로 얼굴이 얽은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많은 전염성 질병이 그러하듯이 천연두도 언제 처음 인류사에 나타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발견된 미이라의 얼굴에서도 얽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천연두는 이미 오래 전에 인류사에 모습을 드러내었음을 알 수 있다. 의사들은 이 무서운 질병에 대해 오랫동안 치료법을 찾아왔다. 고대 중국과 인도의 의사들은 한번 천연두에 걸리면 그 뒤 다시는 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만약 약하게 천연두를 앓게 하면 나중에 심하게 앓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천연두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딱지를 취해 가루로 만든 다음 은으로 만든 관을 사용해서 이 가루를 한쪽 콧구멍 안으로 불어 넣었다. 만약 대상이 남자이면 가루는 왼쪽 콧구멍으로, 여자이면 오른쪽 콧구멍으로 불어 넣었다. 가루가 6개월이 넘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흡입한 사람은 대개 약한 천연두를 앓았다. 이러한 예방적 조처를 목격한 영국의 상인 조셉 리스터는 왕립협회의 회원에게 편지를 써서 이 방법을 영국에서도 실행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 회원은 이 방법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라 얼굴서도 천연두 흉터

그러는 사이에 아랍인들은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의 팔에 칼로 작은 상처를 내고 천연두의 농포에서 얻은 물질을 절개한 부위 안으로 밀어 넣는 방법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터키 의사 엠마뉴엘 티모니는 이 방법에 큰 매력을 느끼고 영어로 이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을 썼다. 그는 1715년 이 책을 영국에 배포했으나 이 책은 영국 의사들에게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인두법이 서구에 소개되고 널리 사용된 데에는 몬테규 부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터키의 영국 대사로 근무하던 남편을 따라 터키에 갔는데 1717년 거기서 천연두에 걸렸고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흉하게 얽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터키 의사 티모니는 몬테규 부인에게 그 해에 태어난 몬테규 부인의 첫딸에게 천연두를 예방하는 방법을 시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몬테규 부인은 동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인두법의 효과를 확인한 몬테규 부인은 이 방법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런던의 왕립의사회원 세 명을 초대해 인두를 접종받은 자신의 딸을 보도록 했다. 그 딸은 본 이들은 당시 왕립의사회의 회장에게 인두법을 지지하도록 주장했다. 대중 매체에 대한 감각도 있었던 몬테규 부인은 영국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 인두시술에 신문기자들을 불러 이 사실을 널리 알리게 했다.

천연두 완치 혁신의술 그 출발점은 동양의학 ‘제너와 종두법’
왕립의사협회가 인정했고 언론의 기사도 우호적이었지만 인두법이 더욱 널리 퍼지는 데에는 다음 단계가 필요하였다. 몬테규 부인은 자신도 두 자녀에게 인두접종을 시켰다면서 웨일즈의 캐롤린 공주에게 접근해 공주의 자식들에게도 인두법을 시술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법을 아직 신뢰할 수 없었던 공주는 이 방법의 안전성에 대해 좀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했다. 이에 6명의 죄수와 한 명의 어린 고아에게 실험을 한 결과 이들이 모두 성공적 결과를 얻자 공주도 안심하고 접종을 허락했다.

인두법은 분명 효과가 있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인두법으로 접종을 받고도 천연두로 사망하는 경우가 12~13%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일부 외과의사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잘못된 준비 기간을 도입한 탓도 있었다. 그들은 인두접종을 하기 6주 전에 환자에게서 사혈을 했고, 열량이 낮은 음식을 주었으며 심하게 설사를 시켰다. 당연히 6주 뒤에 환자는 마르고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접종을 받았다. 이처럼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받은 인두의 접종은 곧 독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은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제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 1749년에 태어난 제너는 초등교육을 받은 뒤에 외과의사로 수련을 받았다. 당시 서구에서는 내과의사와 외과의사의 구별이 아직 엄격했다. 대학에서 책을 위주로 교육을 받는 내과의사와는 달리 외과의사는 현장에서 실습을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또 외과의사는 이발사에서 유래했기에 사회적 지위도 내과의사에 비해 낮았다. 영국의 경우만 해도 의사협회는 왕립협회였지만 외과의사협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내과의사들은 ‘닥터’라고 불렸지만 외과의사는 ‘미스터’라고 불렸다. 제너는 13살에 시골의 외과의사 존 러들러의 견습생이 되어 6년 동안 수련을 받았다. 이 기간은 제너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우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골사람들로부터 손에 우두가 걸린 젖 짜는 사람들은 나중에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두는 영국과 서유럽의 소들만 걸리는 질병으로 젖통과 젖꼭지에 고름집이 생기고 심하면 궤양까지 생기지만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는 가벼운 질병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제너는 사람에게 우두를 접종하면 나중에 천연두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의사들 황당한 반발

이러한 그의 생각이 증명되는 것은 훨씬 후일의 일이었다. 제너는 1796년 제임스라는 아이에게 우두를 먼저 접종하여 우두를 앓게 한 다음 천연두 균을 접종하였다. 제임스는 천연두 균에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않았다. 이렇게 제너는 정상적인 사람을 우두에 걸리게 함으로써 천연두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분명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적 실험에도 불구하고 우두법이 바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의사들 가운데서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떤 의사는 우두 백신을 접종받고 1년 뒤 얼굴이 소와 같이 변형된 아이가 있었다고 보고하는가 하면 백신을 접종받은 소녀가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 걸리는 옴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의사도 있었다. 이러한 거부는 종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뤄지는 치료에 대한 인간중심적 편견에서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제너의 공헌은 천연두를 예방하는 안전한 방법을 발견했다는 실제적 면뿐만 아니라 질병의 문제를 다른 동물종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필요성과 계기를 처음으로 제공했다는 점에도 있다.

여인석/연세대 교수·의학철학 isyeo@yumc.yonsei.ac.kr
실제로 에이즈가 원숭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벼운 질병이 사람에게로 와서 치명적 질병으로 돌변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질병을 생각할 때는 동물을 포함한 자연계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두법의 역사는 이른바 동서양 의학의 구별에 대한 문제도 제기한다. 동서양의학의 구별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인두법은 동양에서 유래하여 서양으로 건너가 사용되다가 우두법 개발의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개발된 우두법은 서양의 대표적 의술로 다시 동양에 수입되었다. 인두법이나 우두법 모두 같은 원리를 사용하는 것이고 보면 인두법은 동양의술이고 우두법은 서양의술이라는 식의 구분이 사실 큰 의미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 의학의 문제도 실용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불필요한 소모적 논의를 생략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우두법의 역사는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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