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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5 19:47 수정 : 2005.12.20 11:26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푸른숲 펴냄

한겨레가 전문가와 함께뽑은 2005 올해의 책 50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푸른숲 펴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원더우먼 행보 ‘재미+의미’ 다잡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21만7천부/ <중국견문록>: 46만부/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18만6천부/ <걸어서 지구 세바퀴반>(4권): 1백만부(추정)

<토지>도 <태백산맥>도 아닌 일련의 에세이들로서, 이건 가공할 만한 판매부수다. 신간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3개월에 21만7천부를 기록, 장차 <중군견문록>의 흥행을 추월할 기세다. 한비야의 책들은 나오는 족족 베스트셀러다. 책 이전에 한비야 자체가 베스트셀러다. 대중의 관심사는, 한비야가 지어내는 이야기나 이론이 아니라 한비야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비야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독자들은 알고 싶어한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보면 그쪽 세계에서 통하는 ‘카테고리’라는 용어가 있다. 재난현장의 상황이나 규모로 볼 때 국내형이 ‘카테고리1’, 아시아나 태평양 같은 지역 단위가 ‘카테고리2’, 전세계적인 지원이 필요한 현장이 ‘카테고리3’이다. 지난해의 쓰나미현장은 ‘카테고리3’이 선포됐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에서 한비야가 하나의 카테고리다. 재난현장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라는 뜻에서다. 지금껏 우리 사회에 그런 카테고리는 없었다. 한비야를 매개로 우리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 오지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비야가 아니었으면, 지구 곳곳에서 지금도 진행중인 재난의 현장들이 좀처럼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신세대에게 한비야가 하나의 우상인 모양이다. 이 글로벌시대에 지구 위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원더우먼, 폼나 보이기도 할 것이다.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지난 5년간 (국제선 비행기) 왕복 74회. 한해에 프랑크푸르트 공항만 12번 지나갔다.”(171쪽) “온갖 종류의 비행기를 타보았다. 군용기, 유엔전용기, 화물기, 전세기, 헬리콥터, 6인승 경비행기까지. 이러다간 열기구까지 탈지도 모르겠다”(173쪽) 텔레비전과 신문에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아이를 안고 있거나, 이라크의 학교에서 수도를 개통해주고, 몽골에서 식량을 나눠주는 모습이 나온다. 이 원더우먼은 판타스틱할 뿐 아니라 테레사 수녀를 닮은 구석까지 있으니 양수겹장, 재색겸비다.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고 모던하면서 고전적이다.

하지만 한비야를 근사한 원더우먼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테레사수녀가 캘커타의 문둥이촌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비야는 쓰나미현장에 도착한 이래 2주간 수천구의 주검을 보았다. “까만 비닐에 싸인 채 길가에 방치돼 있는 주검들. 비닐밖으로 죽은 사람의 손이 빠져나와 있고 가스가 차서 빵빵하게 부푼 배가 터져 내장이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쓰나미 현장을 다녀온 뒤 한동안 고기는커녕 생선도 먹지 못했다. 자꾸만 시체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다. 지독한 악몽을 계속 꾼다.”(255쪽) 그래서 국제본부에는 대형재난현장을 다녀오면 반드시 정신과 상담을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했다.

“우리 단체 현장 매뉴얼에는 에이즈 감염이 의심되는 아이들을 안아주지 말라고 쓰여 있다. 자신도 모르는 작은 상처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될 확률이 1백만분의 1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가워서, 좋아서, 신나서 내게 두 손을 벌리며 달려오는 아이들을 내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긴급구호요원인가. 그냥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월급쟁이지. 그러다가 만에 하나 죽게 된다고 해도 아쉬울 것 없다. 그럼 긴급구호 요원이 사우나 하다 죽으랴? 현장에서 일하다 장렬히 전사해야 마땅하지.”(88쪽)


한마디로 긴급구호, 장난이 아니다. 긴급구호활동가 노릇,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5개 국어의 어학능력(한비야는 우리말 외에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어를 한다), 친화력(그는 계급 연령 인종 불문하고 전광석화의 속도로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재주가 있다), 연중무휴 24시간 풀가동하는 고성능 엔진(그는 전후 이라크의 모술에서 3개월 동안 170여개 학교에 상수도시설을 해주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밤에는 한국의 신문에 원고를 쓰고 한국 사무실과의 일을 진행하느라 이틀에 한번씩 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에너지. 한비야는 회의나 갈등, 자격지심, 불안감 지수가 보통사람들의 평균치보다 현저히 낮다. 친구들에게 ‘조증’이라고 놀림 받을 정도다. 가톨릭신자로서 종교적 소명의식도 강력한 에너지원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치면 그는 하늘을 향해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곤 한다. 한비야는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단순한 수사학은 아니다. 그가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버렸는데, 카테고리1이든 3이든 그 무엇이 두려울까.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한비야가 난민구호활동가로 활동해온 지난 5년간의 경험을 쓴 책이다. 내전 직후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 네팔, 그리고 에이즈를 앓는 서남아프리카, 남아시아의 쓰나미현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북한까지, 어디 하나 만만한 곳 없다. 그야말로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들이다. 하지만 그 현장을 뛰는 한비야의 이야기는 활기차고 따뜻하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 특유의 기(氣)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옛 재벌총수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지만 재벌총수의 자서전을 읽었을 때 당장 내가 넓은 세상에서 할 일은 생각나지 않는다. 반면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방글라데시, 또는 네팔의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한달에 2만원씩 후원금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조선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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