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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전집(22권)> 니체 지음. 책세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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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전문가와 함께뽑은 2005 올해의 책 50
중역·간접 인용에 마침표 찍은 획기적 사건 니체는 자기 작품들에 대해 “궁극적으로는 누구든지 얻어야 하는 영예”이며, 자신은 “만인을 위해” 썼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런 영예가 누구에게도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듣지 못하는 자에게 나는 말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만인을 위한 것이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의 운명을 지녔다고 믿었고 그렇게 예언했다. 말들은 오랫동안 미래의 ‘입’과 과거의 ‘귀’ 사이에서 지체되고 방황하게 되리라.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런 지체조차 지체되고 방황조차 방황했다. ‘듣지 못하는 자에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국에서는 뒤집힌 진리였다. ‘제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한국인이 들은 것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였다. 한 번 말한 것을 두 번 들었으며, 한 목소리로 말한 것을 두 목소리로 들은 셈이다. ‘간접 인용’이나 ‘중역’은 아주 최근까지 니체 말들의 한국적 운명이었다. 물론 어느 번역, 어느 사상도 ‘중역’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사상이란 것 자체가 사물의 번역이므로.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 차원이 달랐다. 그 동안 전달된 니체의 말들로는 의미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오독조차 사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올해 나온 <니체 전집>은 그 자체로 뜻 깊은 사건이다. 니체의 독자가 되기 위해 먼저 독일어 수강생이 되어야 했던 불편은 앞으로 많이 줄어들 것 같다. 번역도 일정한 질을 확보했고, 혼란스럽게 통용되던 몇몇 개념들도 대체로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평가할 대목은 그 동안 소개된 적이 없던 유고들을 출간한 점이다. 과거에도 <권력에의 의지>라는 이름으로 일부 유고가 소개됐지만, 편집을 둘러싼 논란과 제한된 분량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이번에 나온 유고들 덕에 우리는 배로 많은 니체의 글들을 얻었다.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서구에도 니체와 관련된 무서운 오독의 역사가 있다. 니체는 사상의 법정에서 종종 나치즘의 배후조종자로 고발되었다. 처음엔 나치가 그를 오독했고, 다음엔 나치의 비판가들이 그를 오독했다. 그리고 나중엔 그의 변호자들까지 그를 오독했다. 이 과정에서 니체는 나치의 국가철학자로 숭배되었고, 다음엔 그런 이유로 고발되었으며, 또 다음엔 정치와는 무관한 문명비판자가 되어야 했다. 196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니체’가 태어나기 전까지 ‘오독’으로부터 니체를 구해내는 일은 니체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사명과 같았다. 이번 <니체 전집>의 원본이 된 <비판적 니체 전집>(Kritische Gesamtausgabe, 1967~) 역시 그런 사명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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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전집>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풍성하다. 전집에는 하나의 니체가 아닌, 여러 ‘니체들’이 살고 있다. 니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의 저작들은 그가 횡단해 온 수백 개의 건강상태들을 표현하며, 그만큼 많은 ‘니체를 떠난 니체들’에 대해 말해 줄 것이다. 우리가 <니체 전집>에서 찾아낼 수많은 ‘니체들’에 대해 니체도 말할 것이다. ‘그것이 나다(Das bin Ich)’고. 전집이란 결코 한 사상가의 범위를 규정하는 울타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증명이다. 전집은 사상가에게, 특히 니체 같은 사상가에게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정글과 같다. 그러나 정글이야말로 괴물들에게는 축복이다. 니체가 ‘호기심어린 괴물’이라고 말했던 수많은 독자들이 정글로 뛰어들 것이다. 그리고는 저마다 기괴한 모습의 ‘니체’를 들고 나올 것이다. <니체 전집>은 그들 괴물에게나 니체에게나 올해 최고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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