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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5 20:33 수정 : 2005.12.16 15:50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한겨레가 전문가와 함께뽑은 2005 올해의 책 50

“뭐 좀 말랑말랑한 게 없을까”라고 함민복 시인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화두 하나를 던진다. 시집 <말랑말랑한 힘>은 십 년 전 강화도 동막리 어느 빈집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의 체험을 물흙과 물의 글씨로 기록한 함민복의 네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뻘>이라는 시에서 “말랑말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고 말한다. 바람과 햇볕과 소금기가 뒤섞여 있는 물흙에 몸을 내주면서 그가 체험했던 자연의 살결이 곧 말랑말한 것들이다. 뻘밭에 난 수많은 구멍들과 숭어, 늙은 호박, 청둥오리 알, 불타는 나무토막, 시인의 방을 비추는 육십 촉의 알전구, 규호 씨를 비롯한 동막리의 주민들, 삐뚤삐뚤한 길, 수평선, 그리고 할머니들의 눈물 보따리까지 이 모두가 말랑말랑한 존재들이며 둥근 곡선의 세계를 간직한 생명들이다.

곡선으로 가득한 우주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함민복은 생의 남루와 스스로를 도시의 일상으로부터 추방시킨 자가 겪어야 하는 소외감과 고독감을 감내해야만 했으리라. 이러한 고독을 견디며 그는 한밤에 씨앗이 가득한 늙은 호박을 품으로 꼬옥 안아보기도 한다. 도시적 쾌락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 같은 삶은 일종의 예외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말랑말랑한 거울에 비춘 문명의 딱딱한 실상이 날카롭게 드러나 있다.

함민복은 시 <옥탑방>에서 “이 도시의 건물들은 지붕이 없다/사각 단면으로 잘려 나간 것 같은/머리가 없는/벼랑으로 완성된/옥상”이라고 말한다. 직사각형의 도시 공간을 그는 ‘벼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벼랑의 공간에는 도끼날이 번쩍이는 백미러와 썩지 않는 네온의 십자가와 포크처럼 딱딱한 손잡이들이 있다. ‘씨앗’이 없는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이 말랑말랑한 것들을 밀어내며 무수한 벼랑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생명을 포크로 찍어내는 도시적 세계는 ‘죄’마저도 콘크리트로 딱딱하게 발라버리는 악덕의 공간이다. 시 <죄>에서 시인은 “오염시키지 말자/죄란 말/칼날처럼/섬뜩 빛나야 한다/건성으로 느껴/죄의 날 무뎌질 때/삶은 흔들린다”고 이 시대의 가장 큰 악덕을 폭로한다. 죄의식이 없는 시대,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가는 무한경쟁의 시대, 도덕의 씨앗마저 발려버리는 시대를 그는 말랑말랑한 것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벼랑의 끝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힘을 다해 또 다른 벼랑을 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체험으로 보여주고 있는 말랑말랑한 생명의 고향은 마음으로라도 되찾아야 하는 정신의 자궁이라 할 수 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시인들이 경작한 시의 밭과 그 밭에서 추수한 시집들은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의 시집들 가운데 우리의 메마른 정신을 적셔주는 소중한 결실 또한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특히 함민복의 <말랑말랑한 힘>은 딱딱한 것에 길들여짐으로써 딱딱한 것이 낸 상처마저 딱딱해지고 만 우리들의 감성과 정신에 물컹한 개펄 정거장 하나를 세워준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순하고 부드러운 것, 둥글고 구불구불한 것, 그리고 따뜻하고 말랑말한 것들이 품고 있는 온화한 기운과 씨앗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거느리고 있는 ‘그림자’ 속에 아직 담겨 있다고 시인은 개펄의 부드러움을 반죽해 새기고 있는 것이다. 위태로운 벼랑으로부터 자기의 생명적 자존을 되찾는 방법이 무엇인지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생각해보게 된다.

엄경희/문학평론가·숭실대 국문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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