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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5 20:35 수정 : 2005.12.16 15:50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창비 펴냄

한겨레가 전문가와 함께뽑은 2005 올해의 책 50

저물어가는 ‘문학의 시대’ 붙잡을 작은 구원의 손길

일상인의 감각에 충격과 이에 따른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소설은 사소해졌다. 현란하게 마름질된 시어(詩語)가 대중과의 정서적 접촉면을 확보하지 않은 채로 널뛰기 하자, 독자들은 냉담해졌다. 그래서 문학은 불우한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비장해 보이는 것은 비평가들이다. 절망이 극에 달하면 ‘체념’으로, 그것이 다시 ‘냉소’로, 그리고 곧잘 기묘한 ‘합리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난데없이 한 비평가는 작품 밑으로 기어가라고 선언하고, 생뚱맞게 어떤 이는 비평가는 ‘판관’이 아니니 팔짱 낀 채로 작품만을 연모해야 한다는 ‘사이비 문학주의’를 유포한다.

작가들도 퇴행해가는 듯싶다. 사회와의 접촉면이 ‘문학’에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나. 다만 언어 속에서 순사(殉死)할 것이다. 이런 사춘기에나 어울릴 법한 낭만화한 페티시즘에 가까운 문학관이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발설된다. 그런 작가와 비평가들을 ‘독자’라고 명명된 일상인들이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다.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은 누구를 향해 쓰여지고 있는 것일까. 혹 그것은 ‘대화’를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던져진 ‘독백’, 서툴게 쓰여진 일기장과 같은 것은 아닐까. 모든 진지함에 ‘똥침’을 날리는 일이 흔한 상투형이 되어버린 지금, 오히려 김연수의 소설적 실험은 불안하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김연수의 소설은 마디가 여러 개인 지네와 유사하다. 한 사람이 쓴 소설인데, 작품들이 보여주는 양상들이 다채롭다. 정통적인 문법으로 추억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과잉 서정적인 어조로 청춘을 노래하다가, 때 아니게 죽은 폐병쟁이 시인의 생애를 되밟아 가기도 한다. 지독하게 관념적인 듯한데, 그 안에 기묘한 서정이 있다.

올해 출간한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는 ‘타자의 목소리’를 불러오는 실험을 하고 있다. 서술자인 ‘나’의 말로 느껴지던 것이,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너’의 목소리다. ‘나’가 말하고 ‘너’가 듣는다는 구조가 아니라, ‘나’는 듣고 ‘너’는 말한다는 구조의 단편들이 이 작품집에는 가득하다. 그런데 ‘너’의 목소리를 듣는 ‘나’는 목격자가 아니다.


작가는 말하지 않고, 인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는 명제에 김연수는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말조차도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간신히 말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말 자체에 대한 믿음은 사실상 부재한다는 것,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상 안에서 죽어라고 떠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김연수는 자주 환기시킨다.

언어는 헛것이고, 그것에 의해 서술되거나 표현되는 대상은 불확실하다. 기억은 착오이니, 그것을 중계하는 말이 논리적일 수 없다. 이 ‘헛것’ ‘불확실’ ‘착오’가 갈무리된 세계가 현실이라면, 그것은 혼돈으로 충만한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김연수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이 김연수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발성한다. 그 발성법은 하이 소프라노의 아슬아슬한 팔세토 창법을 닮은 것이어서,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기묘한 불안감과 아찔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런 점에서 김연수 소설의 허무주의는 고압적이다.

허무의 밀도가 높아지는 만큼 환각에의 집착이 깊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사실’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바로 그만큼, 현실이 인과율과는 무관한 우연 덩어리로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주인공이 히말라야의 고압을 견디지 못하고 환각 속에서 실종되는 장면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설산’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샹그릴라. 인간 세상의 고통이 완전하게 휘발된 ‘낙원’이 있을 것이다. 그 낙원은 오로지 인간의 환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텐데, 환각을 현실보다도 생생하고 끈질긴 것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김연수의 허무주의는 낭만주의와 깍지 끼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명민한 작가 김연수가 ‘환각’의 생생한 물질성에 대해 몰입하는 것은 그것대로 존중하지만, 동시에 사실로 가득찬 현실을 손쉽게 ‘혼돈’으로 응결시키는 과잉된 확신의 경우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을 던지고 싶다. 지금 나는 김연수의 세계관이나 인식론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김연수가 ‘확신’하고 있는 허무주의조차도 위기에 빠뜨리는 메타적 사유를 작가가 작동시키기를 원한다.

삼각형을 뒤집으면 역삼각형이 된다. 그런데 이조차도 삼각형이라는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현실’을 ‘환각’으로 뒤집어 세운 김연수의 소설이 그런 역삼각형과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나는 김연수가 ‘삼각형’이 아닌 ‘각’이 여럿인 소설을 써내려갈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유령작가’ 김연수보다는, ‘나는 유령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연수를 보고 싶다.

이명원/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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