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15 21:36
수정 : 2005.12.1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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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공진하 글·오승민 그림. 낮은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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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전문가와 함께뽑은 2005 올해의 책 50
세상과 ‘소통의 단절’ 겪는 장애어린이의 심리 그려
서점에 가서 장애를 다룬 어린이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고 병든 사람과 함께 대표적인 소외층으로 분류되는 장애를 우리 어린이문학이 주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앞서나감과 경쟁이 유일가치로 치솟고 있는 풍조속에 장애에 렌즈를 들이대는 노력은 모두가 살만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겐 마음 따듯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장애 소재 어린이책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자로 우뚝서는 얘기이고, 또 하나는 주변의 따뜻한 관심으로 장애아가 비장애인의 삶속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어느덧 이런 두 유형은 ‘장애 동화’의 흐름을 형성해가고 있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전형성에 집착하는 부작용도 조금씩 노출하고 있다.
낮은산에서 나온 <벽이> 역시 최근의 이런 흐름 안에 있다. 다섯살 때 앓은 열병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희귀질병에 걸려 혼자만의 세상에서 외톨이 삶을 살아가던 재현이가 3분 차로 늦게 태어난 여동생 다현이와 가족의 의식전환으로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가족 중의 한 명이 장애를 갖고 있고, 그로 인해 가족들이 불편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최근의 전형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단순화하기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변화 과정에 숨은 것들이 너무 많다. 우선 동화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재현이의 독백이 장애아와 같이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불가능할만큼 생생하고 정밀하다.
휴가 때 자신만 빼고 큰집에 놀러가는 가족들을 보낸 뒤 혼자남은 재현이는 벽을 바라보며 “나도 큰집에 가고 싶어.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큰아버지랑, 형, 누나들도 보고 싶단 말이야 나도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돗자리도 펴고 앉아서 수박도 먹고, 할머니가 쪄주는 옥수수랑 감자도 먹고 싶은데…”라며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담임으로부터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는 법을 배운 뒤에는 “벽아, 내일부터 나 혼자 전동휠체어 탄다. 너 내가 전동휠체어 타는 거 한번도 못봤지? 히히, 실은 나 운전 잘 못해.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게 꼭 술 취한 사람 같대. 그래도 한달 동안 연습해서 많이 늘었어. 날마다 연습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거야.”라며 들뜬 기분을 쏟아낸다.
마치 마음 속에 들어가본 것처럼 장애아동의 심리를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장애아동의 처지에 서 보고 그의 마음에 직접 들어가봄으로써 상호교감과 이해의 폭을 엄청나게 넓히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지은이가 15년 동안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과 직접 부대끼면서 온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차가운 방 벽을 ‘벽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설정한 것 또한 이 동화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못 알아듣겠어, 급한 거 아니지? 그럼 나중에 얘기하자.”며 무시해버리거나 못 알아듣겠다며 되묻는 비장애인들의 말에 장애인들은 얼마만큼의 허탈감과 소외감을 느낄까? 그럴 때 말없이 묵묵히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그 이상 마음 편한 상대는 없을 것이다.
사실 재현이의 요구는 뭔가 특별 대우를 해달라는 게 아니다.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다현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처럼 자신의 말도 들어달라는 얘기다.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면 벽을 보고 얘기하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결국 ‘벽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간의 의사소통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장애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소통 단절을 없앤다면 장애아동의 소외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작가는 ‘획기적’이거나 ‘결정적’인 대답을 내놓진 않는다. 다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불어 장애아 자신의 독립 의지를 충분히 존중해줘야 한다고 제안한다. 겉보기엔 뻔한 답 같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읽는이의 공감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는 점에서 얘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탁월함이 다시 한번 돋보인다.
매번 하고 싶은 말을 벽에게만 했던 재현이는 마지막 부분에서 엄마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저, 전동휠체어에 타, 타고 다, 니…는 거 너, 너무 좋아. 사, 사람…들이 쳐, 쳐다봐도 괘, 괜찮아. 열심히 여, 연습해서 나, 나중에 호, 혼자 학교에도 다, 다니고 노, 놀러 다니고 그, 그럴거야. 맨날 어, 엄마…만 날 쫓아다, 다닐수 어, 없…잖아.” 장애아이건 비장애아이건 마음 속에 담고 있는 목소리에 서로 귀기울일 때 세상의 갈등과 소외와 단절은 녹아 사라질 것이다.
박창섭 기자
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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