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01 06:01
수정 : 2019.02.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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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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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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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16세기 진주 사람 함안 이씨는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진사 하종악의 후처로 들어가 28살에 과부가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가노(家奴)와 음행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녀는 피혐의자로 옥사(獄事)를 치르게 되었다. 고발자는 절의지사(節義之士)로 이름난 남명 조식(1501~1570)이었다. 조선사회는 풍속의 정화를 들어 양반 부녀의 사생활을 감시 감독하는 것을 합법화했는데, 이른바 소문의 정치인 풍문공사(風聞公事)가 그것이다. 당대의 최고 명사 남명 측의 뜻이니만큼 경상 감사는 이씨 집안의 노비들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고 문초를 가했다. 사족 부인이기에 직접적인 형추는 피했지만 그녀가 겪었을 수모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사헌 이인형의 손녀지만 소문에는 장사 없어 졸지에 백주 대로에 내몰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집안 노비들이 탈탈 털렸지만, 부인의 사생활 시비는 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다. 이에 풀려난 관련자들이 기필코 쏘아 죽이겠다며 절의지사 남명을 찾아다니고, 절의지사는 산으로 바다로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한갓 해프닝으로 끝날 이 사건은 명사의 개입으로 국정 회의에까지 올라갔다. 고봉 기대승은 임금 선조와 이 사건을 논의하며 자신의 의견을 낸다. “간통 사건을 밝히기란 가장 어렵다.” “조사를 샅샅이 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세간에 혹 미워하는 자가 있으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와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있다.” 1569년(선조 2)의 일이다. 무고에 혐의를 둔 기대승은 은연중 사족 부인의 사생활을 들춘 남명에게 책임을 묻는다.
한편 이씨의 소문 사건이 무혐의 처리되자 남명은 중앙에서 벼슬하는 두 문인 정탁과 오건 앞으로 편지를 보낸다. 소문은 세간에 떠돌던 것이지 자신이 퍼뜨린 것이 아니며, 하종악의 전처가 자신의 질녀라서 잘못 엮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 나온 정인홍의 ‘사건 보고’에 의하면 이씨의 음행 소문을 감사에게 알리도록 한 것은 남명이었다. 다만 정인홍은 그들이 무혐의로 풀려난 것은 함안 이씨의 종형제가 중앙 요직에 있어 적극 변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한 요직은 이씨의 고종사촌인 송덕봉의 남편 유희춘을 말한다. 실제로 유희춘은 새로 부임할 경상 감사 정유길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함안 이씨를 변호하는데, <미암일기>에도 나온다.
소문은 이제 사실 여부를 떠나 진영 간 대립으로 번졌다. 이씨 측과 남명 측 혹은 고 하종악의 후처 측과 전처 측. 이들은 음모설과 비호설로 서로를 공격하는데, 와중에 남명의 문도들은 ‘음부’(淫婦)의 집을 부수는 등 훼가출향을 단행한다. 이를 보는 중앙의 언론은 곱지 않았다. “거짓으로 고소한 죄”는 묻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의 집을 훼철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남명은 후처의 측근인 오랜 벗 구암 이정에게 절교를 선언하는데, 문도들 역시 스승의 옛 친구 구암을 일제히 비난한다. 이 사태를 관망하던 퇴계 이황은 “무엇 때문에 남명은 그 높은 절개를 스스로 깎아내리며 남들과 시비를 다투는 데 온 마음을 허비하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 남명은 공도(公道)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지 사적인 감정으로 누구를 편드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명이 고 하종악 전처의 중부(仲父)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하종악 전처의 딸이 부친이 남긴 재산을 혼자 차지하려고 계모를 음해하는 소문을 만들어 종조부 남명에게 하소연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씨의 사생활 시비는 경상 지역과 중앙 정계의 주연급 인사들이 총출연한 대사건이 되었다. 그 후 200년이 넘도록 이 소문을 둘러싼 수다는 계속되는데, 소문에 개입하다 체모를 구긴 사례로 주로 회자됐다. 고담준론을 업으로 삼은 명유(名儒)들은 가짜 뉴스로 훼손된 이씨의 명예에 주목하기는커녕 무혐의가 내려진 그녀를 여전히 음부(淫婦)로 호명하며 조롱했다. 부인의 사생활이 윤리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처럼 떠들던 시대에 ‘아니면 말고’ 식의 소문과 맞서 싸웠을 이씨.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혐의를 벗게 된 그 사실만이라도 기억되면 좋겠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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