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2 06:00
수정 : 2019.02.2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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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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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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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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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을 내재화한 여성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는 신사임당·황진이·허난설헌 등 16세기 여성들이 예술로 이름을 얻은 것과 비교된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란 개인의 성향과 능력에 따른 것이지만 시대의 역할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성리학의 발달과 확장은 여성을 규범 속에 가두는 대신 지적 욕구를 자극시키게 되는데, 그 안에서 자기 길을 찾는 여성들이 나온다. 성리학자로 호명되는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이 그 대표주자다. 그녀는 자연과 인간의 이치를 탐구하는 보편지식의 세계에 도전하여 보고서를 남긴다.
윤지당은 이기심성설, 예악설, 사단칠정론 등 조선 후기에 유행한 성리학적 주제들로 사유 영역을 넓히면서 문제적 역사 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그 시대 지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렇다면 사색과 성찰을 주무기로 하는 성리학, 그 길을 그녀가 가게 된 계기와 그녀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묻는 것은 여성에게 그 시대 성리학의 담벼락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즉 “독서와 강론은 장부의 일이고 끼니와 의복 공양, 제사와 손님접대는 부인의 일”로 명시된 사회였다. 또 “부인으로서 바느질과 음식을 모른다면 장부로서 시서(詩書)와 육예(六藝)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던 시대였다.
녹문 임성주(1711~1788)의 동생으로 태어난 윤지당은 형제들 틈에서 익힌 경서 공부로 평생을 밝힐 줄은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양반가 여성의 삶이란 며느리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자녀들을 낳아 기르는 가운데 의미를 찾는 그런 것이다. 조금 익힌 문자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도이지 내 삶을 걸 정도의 비중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명은 윤지당을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혈육 한 점 없이 남편과 사별한 그녀, 화두는 이 절박한 현실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였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타고난 운명이 박복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 중에서 세 가지를 갖추고 있다. 앞으로 보고 뒤로 보아도 위안 삼을 만한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인잠>(忍箴)) 남편과 부모와 자식, 의지할 데라곤 하나도 없는 이 절대 고독 속의 나는 누구인가? 윤지당은 이 화두를 붙들고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하늘이 나에게 이처럼 가혹한 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인고(忍苦)의 성품을 길러 주시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학문으로 세상을 풍미하고자 한 대다수 남성들의 욕망과는 달리 여성 윤지당의 성리학은 ‘살아있기’ 위한 현실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내가 나일 수 있을까?
윤지당의 <중용> 연구는 경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 존재에 대한 주체 의식이 강하게 흐르고 있다. 그녀는 “성인(聖人)과 나는 동류(同類)”임을 선언하고 “남이 한 번 힘쓸 때 나는 천 번을 힘써 성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성인으로 가는 그녀의 길은 치열했다. “아! 빛난다 비수여, 나를 부인이라 여기지 말라. 네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 숫돌에 새로 간 것처럼 하라.” 혼자 남은 방에서 사투를 벌이는 그녀의 학문열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윤지당의 시동생 신광우는 “우리 가문에 시집오신 후로 서적을 가까이하는 기색이 없었고, 일상생활에서도 문장이나 학문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장부의 일이라는 경학 연구에 시선의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혼자 한 공부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자 오빠 임성주와 서신 토론을 통해 자신의 연구를 객관화하는 작업을 한다. 노년에 이른 그녀. “사색은 정밀하고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철저하며 지혜는 밝고 행실은 수양되어 표리가 한결 같으셨다. 순수하고 안정된 경지를 성취하신 것은 오래 덕을 쌓은 큰 선비와 같았다.” 윤지당의 형제들은 그녀가 장부가 되지 못함을 한탄했다. 그것은 남자에게도 어려운 지성의 고지를 탈환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여자의 삶과 병행하기 어려운 당대 지식의 성격을 묻기보다 남성 지식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한 윤지당의 성리학이 살짝 아쉽기도 하다. 역사적 존재가 지닌 한계로 볼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남몰래 했던 공부가 차곡차곡 쌓여지자 그녀는 연구 업적에 애정이 갔다. “죽은 후에 장독이나 덮는 종이가 된다면 또한 비감한 일이 될 것”이라던 우려와는 달리 그녀 사후 형제들에 의해 70여생의 사색과 성찰이 담긴 <윤지당유고>가 간행되었다. 그녀에게 위기는 오히려 새 길을 찾는 기회였다. 규범을 벗어난 현실을 규범을 넘어선 삶으로 자신을 바꾼, 임윤지당이야말로 여성 지성의 역사를 연 앞선 여자이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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