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22 06:01
수정 : 2019.02.22 19:05
‘세계 최고의 히트 상품’ 영어의 역사
파멸 위기도 맞았다 아메리카로 건너가
15만명 쓰던 변방의 언어가 세계어로
“미래는 제2언어로 쓰는 사람들에 달려”
영어의 힘멜빈 브래그 지음, 김명숙·문안나 옮김/사이·1만9500원
영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모국어 화자를 지닌 언어가 아니다. 만다린 중국어(북경어)의 모국어 화자는 10억명이 넘는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들은 3억8천만명쯤 되고, 제2언어나 제3언어로 사용하는 이들까지 합쳐도 7억명이 채 못 된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영어는 ‘세계어’다.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과 말레이어를 쓰는 사람이 만나면 영어로 대화한다. 각종 국제기구의 공식어 중 첫 번째 언어이며,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언어의 70%를 차지한다. 영어의 경제적 가치는 4조2710억파운드(약 6171조원)로 중국어(4480억파운드)는 물론 독일어(1조9천억파운드)나 일본어(1조2770억파운드)와 비교해도 압도적이다.
대체 어떻게, 영어는 세계 최고의 히트상품이 될 수 있었을까. 영국의 작가이자 <비비시>(BBC) 방송국 프로듀서인 멜빈 브래그의 <영어의 힘>은 이 질문에 대한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해설서다. 저자는 일찍이 <영어의 여정>이라는 25부작 라디오 시리즈와 <영어의 모험>이라는 8부작 티브이 시리즈를 제작·방영해 큰 호응을 얻었다. 이를 토대로 집필한 <영어의 힘>은 ‘영어’를 주인공 삼아, 15만명이 쓰던 변방의 언어가 15억 세계인의 언어가 되기까지 1600여년에 걸친 모험과 성장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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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한 건물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오기를 요구하는 팻말이 영어로 적혀 있다. 사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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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도유럽어를 어머니로 둔 영어는 약 4천년 전 인도의 평야지대 어딘가에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으로 한참을 달린 끝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토를 지키던 게르만 용병들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5세기 브리타니아라 불리던 영국에 도착했다. 강인하고 무자비한 게르만 전사들은 켈트어를 학살하고 켈트인을 노예로 만들며 그 땅의 주인이 됐다. You, man, is 등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100개의 영어단어 대부분이 당시 사용되던 고대영어에서 왔다. 7세기 들어 24개의 고유한 문자(알파벳)까지 장착하며 승승장구하던 영어의 창창한 앞날을 가로막은 것은 북쪽에서 몰려온 바이킹 전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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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이자 <비비시>(BBC) 방송국 프로듀서인 멜빈 브래그는 ‘영어의 모험’이라는 8부작 티브이 시리즈를 제작·방영했고, 이 내용을 토대로 <영어의 힘>을 저술했다. 사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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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부터 300년 동안 끊임없이 들이닥친 바이킹 가운데 특히 데인족(덴마크인)은 문서자료를 약탈하고 도서관을 불태우며 영어를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영리한 왕 알프레드는 게릴라전으로 데인족을 제압하는 한편 영어를 ‘단결의 구심’으로 삼아 국난을 극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가 영어를 널리 가르치고 영어책을 부지런히 펴낸 덕분에 영어는 첫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200년도 안 돼 프랑스어를 쓰는 노르만족이 침략하면서 영어는 다시금 ‘파멸의 위기’를 맞는다. 이후 300년 동안 고대영어의 85%가 사라지고 1만여 개에 달하는 프랑스어가 영어를 잠식했다. 지배계급이 재빨리 프랑스어를 받아들이는 사이 영어는 민중들 사이에서 ‘저항의 언어’로 명맥을 이어갔다. 흑사병과 농민반란을 겪으며 ‘왕의 언어’라는 지위를 간신히 되찾은 영어는 바티칸과 최후의 사투를 벌인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번역해 영어 성경책을 편찬하는 일은 부패한 가톨릭에 맞선 종교개혁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어가며 영어 성경책을 만든 이들과 급격히 발달한 인쇄술에 힘입어 결국 하느님마저 제편으로 만든 영어는, 그 귀한 영어 성경을 가슴에 품은 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이들 덕분에 세계정복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가질 수 있었다.
한때 핍박받는 언어였던 영어는 일단 지배적 위치에 놓이자 게걸스런 포식자가 되어 세계 곳곳의 언어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켰다. 영어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프랑스어는 어휘 수집과 신조어 생산에서 가장 만만한 텃밭이었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네덜란드어 같은 유럽 언어는 물론 말레이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힌디어, 아랍어도 영어의 먹잇감이 됐다. “영국 선원들이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동시에 언어를 약탈해 왔”던 것이다. 지식인들은 이탈리아의 건축과 예술, 음악에 압도돼 그 언어를 슬쩍 훔치는가 하면, 스러져가는 라틴어를 소환해 영어사전에 제 것인 양 올려두기 일쑤였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영어는 과학과 기술의 언어로 부상했고, 수학자와 과학자 들은 논문을 쓰기 위해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 언어는 힘의 지원이 있을 때 세계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라틴어가 국제적인 언어가 된 것은 로마인들이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육군을 보유한 힘센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영어가 전파된 것은 “무기와 해상력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 후 교역을 통해 이를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언어가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였다면, 언어의 판도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세계 최대의 상품생산 기지이자 교역국이며 첨단 과학기술의 진지로 부상한 미국은 영어 종주국으로서 영국의 자리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20세기 들어 미국의 브랜드, 대중가요, 영화, 티브이 프로그램이 전 세계를 강타했고, 영국 청년들까지 미국의 ‘흑인영어’로 노래하며 춤추는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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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영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을 맞는다. 미국의 대중문화와 군사력은 영어를 전 세계적으로 퍼뜨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 사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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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 당시 인도에서 ‘특권과 승진의 언어’로 여겨지던 영어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자국민을 노예로 만드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데 인도의 독립 이후 영어로 작품을 쓴 인도 소설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큰 성공을 거뒀다. 차별과 핍박의 도구였던 영어가 ‘세계로 열린 창’ 역할도 한 것이다. 오늘날 인도 영어는 영국 영어나 미국 영어와는 또 다른 언어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식 영어인 ‘싱글리시’는 정부의 규제에도 아랑곳없이 점점 더 널리 쓰이는 추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현지 단어들이 표준영어와 어우러져 ‘새로운 영어의 탄생’을 예고한다. 저자는 “영어의 미래가 더 이상 선조들이 아니라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영어가 다른 많은 언어에서 단어를 가져오고 시험해보고 빨아들인 것처럼, 이제는 다른 언어들이 영어를 가져다가 구부리고 적절하게 만들면서 영어를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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