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15 06:02
수정 : 2019.03.15 20:04
조선의용군 총사령직 맡은 ‘무정’
안문석 전북대 교수 평전 내 복원
윤봉길 의사가 김구의 행동대원에
불과하다는 편견 깨는 평전도 나와
무정 평전-비운의 혁명가 무정의 삶 그리고 생각안문석 지음/일조각·2만5000원
윤봉길 평전-강의한 사랑의 독립전사이태복 지음/동녘·1만6000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투쟁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하는 시도가 활발하다. 유명세에 비해 그 삶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놀랄 만큼 부실했던 열사의 구체적인 족적이 새삼 드러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귀한 이름들이 뒤늦게 호명되는 중이다. 독립운동가 무정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생소한 이름이다. 남한은 해방 후 북으로 간 그를 까맣게 잊었고, 북한은 김일성과 정치투쟁에서 패배해 숙청된 그를 무참히 지웠다.
|
1949년 2월 북한에서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무정. 사진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일조각 출판사 제공
|
안문석 전북대 정치학과 교수가 남북한이 모두 외면한 비운의 독립운동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같은 하숙방을 쓰는 선배에게 “북한에서 해방 후 김일성보다 더 유명했던 무정 장군”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이 계기였다. 이후 ‘그토록 유명했던 무정이 왜 권력투쟁에서 졌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된 다소 험난한 연구과정이 이어졌고, 정치학자로서 저자의 관심은 무정의 숙청을 전후로 한 북한현대정치사로 확장됐다.
무정의 본명은 김병희, 190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무정’은 중국 군관학교 시절 상관이 군인을 뜻하는 ‘무’(武) 자를 넣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1919년 15살의 나이에 3·1운동에 참가한 것이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첫 행보였다. 이듬해 중앙고보에 진학한 무정은 중앙고보를 비롯한 7개 학교 교장들이 전문학교 이상 학생들에게만 학생운동을 허용하기로 결의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입한다. 8개월간 활동하며 세 번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건너갔고, 바오딩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무인’의 길을 걷는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직을 맡아 무장독립운동을 펼치는 한편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 교장으로서 청년독립군 양성에도 힘썼다. 해방 후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북한에 입성한 무정은 북한군(조선인민군) 창설의 기반을 닦으며 큰 활약을 펼쳤으나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연안파의 고위 지도자에 대한 김일성의 견제에 시달리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을 방어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등의 이유로 숙청됐다.
|
북한에 있는 무정의 묘비. 1951년 11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정은 1994년 복권돼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일조각 제공
|
<무정 평전>은 무정의 일대기를 다루되 특히 무정이 1948년 3월 초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한 일을 시작으로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나 1951년 8월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 중점을 뒀다. “숙청의 실제 이유는 무엇이며 무정의 숙청이 북한체제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가 추구했던 정치노선은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무정의 해방 이전 무장독립운동에 치우쳐 있던 기존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 북한현대정치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저자의 뜻이 담겨 있다. 저자는 무정이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경계한 점에 주목하면서 그를 “이념을 추구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민족을 일제를 비롯한 강대국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까 고민한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이러한 무정의 고민은 목하 한반도의 고민과 그대로 맞닿아 있다”고 짚는다.
|
무정이 조선인민군 포병 부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휘하의 연대장을 평가한 친필 평정서. 사진출처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일조각 출판사 제공
|
무정에 비하면 너무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윤봉길 의사를 재조명한 <윤봉길 평전>은 ‘윤봉길 의사가 던진 것은 사실 도시락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었다’는 뜻밖의 폭로를 통해 우리가 실제로 윤봉길 의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평전을 집필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것이 ‘김구의 행동대원 윤봉길’이라는 왜곡된 프레임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상하이 폭탄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주체적인 독립전쟁 선포였다”고 강조한다.
윤봉길 의사가 백범 김구의 행동대원에 불과하다는 편견은 <백범일지>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그간 윤봉길 의사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방해해왔다. 그런데 저자가 4·29 의거를 둘러싼 여러 사실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과, 당시 거사를 김구가 주도했다는 <백범일지>의 기록은 “김구의 측근 그룹이 김구의 역할을 강조하고 당시 도산 안창호에 집중돼 있던 중국 측의 후원을 자신들에게 돌리려 한 책동책의 일부였다”는 점이 드러났다. <윤봉길 평전>은 “독립전사 윤봉길이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실행한”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폭탄의거를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 출발해, 스물다섯 해에 걸친 청년 독립운동가의 짧고 강렬한 자취를 따라간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