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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2 05:59 수정 : 2019.03.25 18:03

광주민주화운동 다룬 안내서 출간
우리 현대사·세계사적 의미 짚어
“진상규명 되지 않아 망언들 나와”

너와 나의 5·18-다시 읽는 5·18 교과서
5·18기념재단 기획, 김정인 외 4명 지음/오월의봄·2만6000원

5월 18일, 맑음-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 운동 이야기
5·18기념재단 기획, 임광호 외 3명 지음/창비·1만2800원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한강, <소년이 온다> 중)

그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은 1980년 5월18일로부터 39년이 지난 지금도 훼손되고 있다. 이미 1997년 대법원이 폭도는 광주 시민이 아니라 신군부와 계엄군임을 확인했지만, ‘5·18 망언’은 여전히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된다.

술술 읽히는 5·18 안내서가 필요한 까닭은 ‘훼손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훼손되지 않으려면 ‘상식’이 ‘상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5·18>과 <5월 18일, 맑음>은 그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개괄하는 친절한 안내서다. 두 책은 5월 광주의 그날을 소묘하는 데서 더 나아간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 안에서 5·18의 좌표를 그리고, 다른 나라 사례와 비교해 민주화운동으로서 5·18이 ‘우리’의 기억으로 남아야 하는 까닭을 짚는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 앞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촬영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우선 해방 이후 국가폭력과 이에 대한 저항의 원경에서 시작해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의 그날로 독자를 안내한다. 1980년 5월18일,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전남대 정문을 봉쇄했다. 오전 10시 학교 앞에 모인 학생들이 해산하지 않자 공수부대원들은 “돌격”한다. 주검이 쌓일수록 더 많은 시민이 금남로에 모였다. 21일 오후 1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에 맞춰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를 향해 일제 사격했다. 시민들은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 광주를 지키려고 무기를 들었다. 계엄군이 일시 퇴각한 22일부터 27일까지 광주는 ‘절대공동체’를 이룬다. 함께 주먹밥을 나누고 주검을 수습하고 병자를 돌봤다. 27일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은 시민군은 자신들이 그날 죽을 줄 알고 있었다. 광주가 흘린 피는 이후 민주화운동을 지탱하는 동력이 됐다. 6월 항쟁은 그 결과물이다.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나 광주에 빚졌다.

한 공수부대원이 금남로에서 학생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다. 촬영 ⓒ나경택, 5·18기념재단 제공
그날 광주에 진 빚을 한국 사회는 갚지 못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월 ‘5·18 망언’을 쏟아낸 이종명, 김순례, 김진태 의원은 건재하다. 왜 ‘5·18 망언’은 그치지 않나? <너와 나의 5·18>은 한 장에서 그 이유를 따져봤다. 군부는 5·18을 간첩 등 “불순 세력”이 주동한 폭동으로 날조했다. 여기에 극우세력은 ‘북한군 개입설’을 보탰다. 지만원은 200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을 광주에 투입했다”는 내용을 <동아일보>에 광고한다. 지만원은 2013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으로 유죄선고를 받는다. 재판부는 북한군 개입설을 “객관적인 근거 없다”고 판단했다. 지만원의 주장은 역사학계에서 고려할 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또 나오고 또 나온다.

<너와 나의 5·18>의 저자는 2002~2009년 5·18 왜곡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를 꼽아봤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2009년 용산참사 등 정치적 전환 시기마다 5·18 왜곡 건수가 늘었다. “극우세력은 보수정권이 위기에 처해 남북대립을 조장할 필요를 느낄 때 5·18 왜곡 담론을 불러내 냉전 반공 논리를 확산시키고 보수 세력의 결집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5·18 망언’이 계속 나오는 까닭은 여전히 진실이 다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발포 명령을 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는지 아직도 진상규명되지 못했다.

5·18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너와 나의 5·18>은 각 장 뒤에 ‘더 생각해보기’, ‘깊이 생각해보기’를 넣었다. 5·18 유족과 세월호 유가족의 상처를 보듬으려면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5월 18일, 맑음>은 민주주의, 언론 등 매 장마다 열쇳말을 묵었다. 또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어머니회, 파리코뮌 등 여러 나라 사례를 담은 열쇳말을 보태 세계사 흐름에서 5·18의 의미를 짚었다.

공수부대원은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했다. 한 여성이 군인의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남성의 옆을 끝까지 지키며 따라가고 있다. 촬영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왜 곱씹어야 하나? 5·18이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마땅한 무엇이지 못했을 때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당하는가’ ‘그 고통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너와 나의 5·18>)

김소민 자유기고가

5월20일 금남로. 계엄군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있다. 촬영 ?이창성, 5·18기념재단 제공

가족의 시신을 확인한 유가족이 울부짖고 있다. 촬영 ⓒ이창성,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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