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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2 06:00 수정 : 2019.03.22 19:50

미국 시 전문지 ‘시’에 실린 글모음
야구선수·군인·목사 등 시 애호가 50명
시를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답변

누가 시를 읽는가
프레드 사사키·돈 셰어 엮음, 신해경 옮김/봄날의책·1만6000원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손을 쓸 수 없는 췌장암 선고를 받자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목사인 사촌은 생각이 종교적인 쪽으로 흐르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그는 아니라고 답했다. 로티의 아들은 “철학 쪽으로는요?” 하고 물었다. 철학도 마찬가지였다. 로티는 직접 쓴 것도 읽은 것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끈질기게 물었다. “읽은 것 중에 뭐라도 소용이 있는 건 없어요?” 무심코 대답이 튀어나왔다. “시.”

현실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제각기 방법을 쓴다. 누구는 영화를 보고 누구는 음악을 듣는다. 소설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춤을 춘다. 그리고 시를 읽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시 전문지 <시>(Poetry)에 실린 글을 모은 책 <누가 시를 읽는가>가 출간되었다. 시를 읽게 된 경위부터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를 50명의 시 애호가들이 답한 글을 묶은 책인데, 필자들은 시인이 아니라 야구선수, 군인, 목사, 철공노동자, 만화가를 비롯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앞서 말한 리처드 로티 역시 그런 응답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현대미술가 아이 웨이웨이,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삶과 시를 연결짓는 과정을 따라가면 당장 시를 읽고 싶어진다. 정확히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열정도 무기력도 시가 적확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음에 감탄하게 된다.

<누가 시를 읽는가>는 미국의 시 전문지 <시>(Poetry)에 실린 50명의 시 애호가들이 시를 읽게 된 경위부터 왜 읽는지, 어떻게 읽는지 묻는 질문에 답한 글을 묶은 책이다. 필자들은 시인이 아니라 야구선수, 군인, 목사, 철공노동자, 만화가, 작가를 비롯한 여러 직업을 가졌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생물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시를 연구했다. 세계 곳곳에서 시인들은 낭만적인 열정에 휩쓸린 사람의 뇌가 분출하는 감정의 낙진들을 묘사해왔단다. 제프리 초서는 “사랑은 온종일 눈멀었다”고 썼고, 19세기 일본의 시인 오노 노 코마치는 이렇게 노래했다. “누워서도 잠들지 못하는 밤, 뜨거워라/ 점점 커지는 열정의 불꽃/ 내 마음속에서 활활 불타는구나.” 이런 묘사를 피셔는 생물인류학자로서 독해한다. “짜르르한 배 속에서부터 진땀 나는 손바닥, 후들거리는 무릎,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까지, 이런 신체적 반란은 아마도 도파민과 밀접하게 관련된 화합물인 노르아드레날린의 효과일 것이다.”

사랑만큼이나 정신적 혼란 역시 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익숙하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이언 맥길크리스트는 자신이 맡았던 환자가 말한 강과 운하의 차이를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강은 평화요, 운하는 고통입니다.” 맥길크리스트는 어른이 되고 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블레이크, 횔덜린, 카우퍼를 비롯한 남성 시인들 다수가 정신병을 앓은 이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디킨슨, 플라스, 샬럿 뮤를 비롯해 가장 좋아하는 여성 시인들 역시 정신병 아니면 성 정체성 혼란, 혹은 둘 다를 겪은 이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전반적인 우울감이 “예외적으로 우반구에 치우친 뇌기능의 편중 상태 때문이 아닐까”라는 추측이 이어진다. 맥길크리스트는 영국의 시인 이보르 거니의 ‘신에게’라는 작품을 정신과 의사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시라고 단언한다. 이런 구절. “당신은 왜 삶을 이토록 견딜 수 없이 만들어놓고/ 나를 사면의 벽 안에 두었는가.”

시가 사랑과 우울만을 노래하고 현실의 혼란을 뒤로했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면 미 육군사관학교 총장을 역임한 윌리엄 제임스 레녹스 주니어의 글이 도움이 된다. 그는 선명하게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관생도 졸업생들을 키워내기 위해 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크림전쟁에 대한 알프레드 테니슨의 ‘경비병여단의 돌진’을 말한다. 그 시의 2연은 이렇다. “‘경비병여단은 진격하라!’/ 깜짝 놀란 사람이 있었던가?/ 그래도 병사는 몰랐으리라./ 누군가가 실수했다는 건./ 그들의 몫은 대꾸하지 않는 것,/ 그들의 몫은 이유를 따지지 않는 것,/ 그들의 몫은 따르고 죽는 것뿐,/ 죽음의 계곡 속으로/ 육백이 나아갔다.” 무의미한 야만은 이런 것이다.

당신이 누구든, 어떤 일로 생계를 꾸려가든, 당신의 삶은 시를 통해 풍부한 의미를, 그 의미를 표현할 언어를 새로 얻게 될 것이다. <누가 시를 읽는가>가 여러 분야의 필자들을 통해 알려주는 사실이 그것이다. 또한, 시는 현실의 구체적인 고난을 막아주는 역할도 할 수 있다. 현대미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시인이었던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그의 아버지 아이 칭은 신장으로 유배되었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다. 문화혁명기에는 공중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다. 온 마을이 돌보지 않는 시골 공중화장실을 성실하게 관리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이 웨이웨이는 그것이 가장 훌륭한 시적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시인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고, 나는 그런 결과들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상황이 제일 어려울 때조차도 나는 아버지의 심장이 세계에 대한 순수한 이해로 보호받고 있음을 알았다. 시는 중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야구선수였던 페르난도 페레즈는 관계자들을 고도로 소외시키는 야구선수로서의 생활 중에 시읽기를 즐겼는데 “시가 환경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그가 세계를 분리하는 방식이 시읽기다. “초목이 무성한 황야가 치열한 경쟁을 돌볼 수 있는 셈”이다.

<누가 시를 읽는가>의 큰 장점은 시와 이미 가깝든 아니든 익숙한 싯구와 난생 처음 보는 근사한 시, 시인을 두루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마치 친한 친구를 다른 친한 친구에게 소개시키는 사람들처럼, 다들 한 행이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애닳아한다.

작곡가이자 뮤지션이며 시인인 졸리 홀랜드는 “경험을 말하는 것 말고는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고 썼다. “저마다 키를 잡고 언제 해류가 세차게 흐르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이 책에는 그래서 50가지의 시 감상 방법론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신은 51번째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시를 읽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누가 시를 읽는가>를 펴낸 봄날의책은 한국어판을 만들기 위한 시 애독자들의 투고를 받는다고 한다. 누구든 응모 가능하다. 마감은 2019년 12월31일.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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