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2 06:00
수정 : 2019.03.2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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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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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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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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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산 지 50년, 이빙허각(李憑虛閣, 1759~1824)은 일상과 사색의 기록인 <규합총서>(閨閤叢書, 1809)를 세상에 내놓는다. 책 이름처럼 여성의 공간인 규합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망라했다. 모두 다섯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음식과 의복을 마련하는 일에서 채소 및 가축 기르기, 태교·출산·육아에 관한 지식과 처방, 주거 및 위생에 관한 정보들을 담았다.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일과 관련 지식을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이다. 살림살이의 경험에 독서로 얻는 지식과 정보를 버무리고, 다시 독자적인 설명과 해석을 덧붙였다. 그녀는 이 책이 양생(養生)과 치가(治家)의 교본이 되기를 희망했다.
알다시피 근대 이전 사회의 남녀는 일의 영역에서도 엄격하게 분리됐다. 그 영역 분리는 고대 경전에 명시됨으로써 현실적인 요구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즉 남자의 ‘바깥일’과 여자의 ‘집안일’이 자연의 원리이자 성인의 말씀이곤 했다. <시경>에는 여아가 태어나면 실패를 쥐여준다고 했는데, 주석가들은 여자에게 의복 제조의 몫을 주문한 의례라고 보았다. 남아에게 구슬을 쥐여주며 고귀한 자리에 나아가길 바라는 것과 대비된다. <주역>에는 주부를 중궤(中饋)라고 하여 음식을 도맡은 사람으로 정해 놓았다. 일상의 삶을 만들고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일, 그것이 여자에게 부여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위대한 노동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소비되고 마는 하찮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밥이나 하고 옷이나 만들던’ 여자들, 그녀들의 일을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이가 바로 이빙허각이다. 우선 그녀는 삶의 현장에서 한시도 놓칠 수 없는 의식주를 일정한 체계로 분류하고 범주화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여자의 일’이 그녀로 인해 지식의 범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여자들의 관심과 경험이 지식을 구성하는 방법이 되고 지식의 내용이 되었다. 예컨대 염색 항목에서 쪽빛을 어떻게 얻는가를 보면, 이론을 소개한 것에 불과한 남성 실학자들과 달리 그녀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가운데 얻어낸 여성 특유의 경험으로 설명한다. 또 입으로 전해오던 피부 관리의 민간요법과 자연 속에서 찾아낸 화장의 재료를 실험과 실증을 통해 하나의 지식으로 체계화하였다. 여자들의 외모를 가꾸는 데 사용되는 용품이나 제조 방법을 항목으로 배치한 것은 과학과 실용에 대한 여성의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빙허각의 작업은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여성의 경험과 관심이 지식 구성의 중요한 원리이자 요소임을 확인해 준 것이다. <주사의>(酒食議) , <봉임칙>(縫?則), <산가락>(山家樂), <청낭결>(靑囊訣), <술수략>(術數略)의 다섯 범주로 구체화된 그녀의 작업은 사실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과 연동되어 있다. 그녀는 가정 관리가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위생과 음식 등 양생의 지식들이 중요해지는 전환의 시대를 함께 만든 것이다. 여기서 서명응(徐命膺), 서호수(徐浩修), 서유구(徐有?)로 이어지는 시가(媤家)의 학풍은 그녀를 실학자로 이끈 동인이 되었다. 습관적으로 행해지던 여성의 집안 살림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지식의 체계로 만들어 낸 빙허각의 작업은 지성사 및 생활사의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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