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9 06:01
수정 : 2019.03.30 19:22
최근 한국의 반지성주의 흐름 분석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
반지성주의자 스스로 피해자로 여겨
“진지충·PC충 되길 마다 않고 싸워야”
타락한 저항-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이라영 지음/교유서가·1만3000원
‘장자연 사건’을 다룬 기사에 가장 흔히 달리는 댓글은 “여성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2009년 사건 당시부터 여성단체들이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라’고 줄기차게 외쳐왔다고, 누군가 댓글 형식으로 알려준다. 더욱 친절한 누군가는 지난 10년간 여성단체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활동한 이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신문기사들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잠잠해진 댓글창을 보면서 ‘오해가 풀렸나 보다’고 낙관하는 것도 잠시,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씨가 여성단체와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주르르 달린다. “간만에 여성단체가 일 좀 했군요.” “이제라도 나서니 다행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1분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진실을 왜곡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게으르고 성급한 일부 네티즌의 오해’라고 지나치기엔, 매번 이런 식으로 불려나와 욕을 먹는 것이 ‘여성단체’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미세먼지가 심한 날마다 “환경운동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고 핏대를 올리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상황에 무지한 나머지 엉뚱한 과녁에 대고 분풀이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여성단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무지하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일까. <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에 대해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쓰며, 모르지만 규정하려 한다.” 여성단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라서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전혀 알고 싶지 않으며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지하기는커녕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많다. 그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편견과 혐오를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며 과학적으로 포장한다. 저자는 “19세기까지 서구에서 과학과 성경을 바탕으로 흑인과 여성 일반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한국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에게 그 화살을 겨냥하면서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역차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믿음”이 한국사회에 창궐하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의 목표는 ‘기득권 유지’에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마녀’인 각종 ‘충’을 계속 만들어내고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반지성주의자들은 ‘모르고 싶어 하는 대상’을 언제나 비인간화하고, ‘이들과는 다른 나’를 확인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라 느끼고 안도한다. 언제나 물리쳐야 할 ‘적’이 있으며 ‘내 편’이 아니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폐’로 여긴다. 참으로 피곤한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맹렬한 혐오를 땔감으로 삼는 만큼 웬만하면 지치는 법이 없어 상대하는 사람들이 더욱 피곤하다는 게 함정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자들이 자신을 ‘기득권자’로 여기기는커녕 한없이 가엾고 상처받은 약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식민지 남성성’에서 찾는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 지배국과의 관계에서 약자나 피해자가 된 남성이 자국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해 남성성을 복원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이다. “서구와 일본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가 된 이들은 서사를 장악하고, 기존 약자나 소수자의 새로운 움직임을 역차별이나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중립적 위치에 놓은 채 타인을 멋대로 지적하고 비난하는 ‘지배하는 피해자’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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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8일 오후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팬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채 ‘막말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격려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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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 반지성주의의 흐름을 ‘블랙리스트’,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 등 세 가지 열쇳말로 풀어나간다. 반지성주의가 ‘알기를 거부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블랙리스트는 한국의 보수 우파, 나꼼수 현상은 중도 우파, 메갈리아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 나타난 반지성주의의 양상을 각각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역대 보수 정권들의 문화정책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와 대중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온 과정을 살펴본다.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시민으로서 표현과 자유에 관해 제대로 배우고 훈련할 기회가 드물었던” 까닭에 “금지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대신 금지당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력의 쾌감을 느끼는” 데 익숙해진 건 아닌지 반문한다.
또한 2011년 4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방송된 팟캐스트 <나꼼수>가 정치를 소비하는 새로운 대중적 플랫폼을 제시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나꼼수의 반지성적인 면모가 마초적 남성성과 결합해 성차별을 ‘자유롭게 민주화’하도록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보수 집권 10년간 ‘이기는 정치’를 갈망하던 이들은 ‘이명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과잉된 정의감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의제는 “나중에!”로 미뤄지고 수많은 혐오가 정당화됐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메갈리아’ 논쟁에 대해서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벌어진 마녀사냥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서 ‘나를 설득해보라’고 말하는 진보 진영의 반지성적 태도를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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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은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가 혐오와 차별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 교유서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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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는 피해자’는 생각하는 인간과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면서 ‘개인의 취향’과 ‘표현의 자유’를 ‘혐오할 자유’로 대체한다. 그러나 “백인을 좋아하는 취향, 뚱뚱한 여자에 비위 상하는 취향,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취향”과 같이 상대가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결코 취향이 될 수 없으며 이런 혐오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나아가 “반지성주의와의 싸움은 지배하는 그들이 조롱하는 ‘진지충’ 또는 ‘피시(PC)충’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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