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05 06:01
수정 : 2019.04.05 19:54
기괴하고 끔찍한 실험 불사하며
호르몬 정체 밝히려 한 100여년
‘치명적인 헛발질’ 역사 다루며
유쾌하게 호르몬의 세계로 안내
크레이지 호르몬랜디 허터 엡스타인 지음, 양병찬 옮김/동녘사이언스·1만9800원
시작부터 미친 짓이었다. 1848년 8월2일 독일 의사 아놀드 베르톨트는 뒷마당을 뛰어노는 수탉 여섯 마리를 잡아 괴상망측한 수술을 했다. 두 마리 수탉의 고환을 각각 하나씩 떼어내고, 두 마리는 양쪽 고환 모두를 떼어냈으며, 나머지 두 마리는 고환을 떼어낸 다음 그중 하나를 다른 수탉의 ‘배’에 이식했다. 고환이 전혀 없는 수탉은 암탉의 뒤를 쫓지 않았다. 고환이 하나만 있는 수탉은 전과 다름없이 암탉 꽁무니를 쫓았다. 고환을 엉뚱한 곳에 이식받은 수탉 역시 암탉을 따라다녔다. 베르톨트는 연구 결과 “고환이 어떤 물질을 혈액으로 분비하고, 그 물질은 혈액을 통해 특정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썼다. 호르몬의 작용 메커니즘을 사상 최초로 설명한 네 쪽짜리 연구보고서가 그렇게 탄생했다.
베르톨트 못지않은 호기심을 지녔던 북잉글랜드 의사 조지 올리버는 동네 정육점에서 얻은 양과 소의 부신을 아들에게 먹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마침내 아들의 혈압이 급등하자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런던 과학자들과 팀을 꾸려 개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이어갔다. 부신에서 분비된 정체불명의 이 액체는 먼 훗날 ‘아드레날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당시엔 호르몬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과학자들은 20세기 이전부터 우리 몸 곳곳에서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특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그 화학물질의 분비를 촉진하는 것이 ‘신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02년 1월16일 윌리엄 베일리스와 어니스트 스탈링이 실험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갈색 테리어(개) 한 마리를 마취한 후 소화관 근처 신경을 모두 절단하고 소화된 음식물과 유사한 물질을 개의 소장에 밀어 넣었다. 소장과 연결된 신경이 없는데도 췌장에선 소화액이 분비됐다. 두 사람은 “췌장이 소화액을 분비하는 것은 신경과 무관한 화학적 반사”라고 선언해 학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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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생쥐는 정상이고, 왼쪽 생쥐는 렙틴 결핍을 초래하는 유전적 변이를 갖고 있어 폭식을 한다.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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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분비학을 선도한 이 호기심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는 지나치게 과감한 실험방식 때문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쥐, 토끼, 닭, 개, 고양이 등 수많은 동물이 호르몬 연구의 제단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갔던 것이다. 베일리스와 스탈링의 강연에 잠입해 끔찍한 실험을 생생하게 목도한 학생들이 생체해부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강연 1년 후인 1906년 5월15일 런던 래치미어 가든에 갈색 반려견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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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예일대학교 쿠싱센터에 있는 쿠싱뇌중앙보관소에 하비 쿠싱의 뇌 수집품이 전시돼 있다.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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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체실험에 반대하는 성난 군중’도 호르몬의 정체가 미치도록 궁금한 과학자들의 갈수록 과감해지는 시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뇌수술 권위자이자 20세기 초반 신경외과학계의 거두인 하비 쿠싱은 뇌 기저부 근처에 매달린 완두콩만한 분비샘(뇌하수체)이 신체 장애와 질병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당시로선 혁명적이라 할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쿠싱은 다양한 실험을 했다. 난쟁이들을 진료실로 불러 소의 뇌하수체 추출물을 먹게 한 뒤 키가 커지는지 관찰하기도 하고, 사망 직후의 아기에게서 뇌하수체를 적출해 뇌하수체 종양 진단을 받은 48살의 남성에게 이식하기도 했다. 동료들에게 “살아있는 환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영안실, 공동묘지, 박물관을 샅샅이 훑고 장의사에게 뒷돈을 줘가며 시신을 매입해 비정상적인 신체를 가졌던 사람들의 뇌를 연구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는 뇌 표본이 담긴 수백 개의 유리병으로 가득한 방이 있다. 쿠싱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것인데, 그가 사망한 뒤 대학 기숙사 지하창고에 50여년간 방치돼 있다가 술에 취해 어두운 지하실을 탐험하던 학생의 눈에 띄어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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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증을 치료할 성장호르몬 주사제를 만들기 위해 뇌하수체를 채집해 보관해 놓은 큰 유리병.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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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 존재와 역량이 확인되자 호르몬은 연구실 밖으로 흘러나와 대중들의 삶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의사이자 의학전문 작가인 랜디 허터 엡스타인은 <크레이지 호르몬>에서 호르몬의 역사를 파헤치려는 이유에 대해 “지난 20세기가 ‘믿기 어려운 발견’의 시기인 동시에 ‘터무니없는 주장’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슐린이 발견되면서 당뇨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에는 신생아에 대한 갑상샘호르몬 기능 검사가 개발돼 수많은 아이가 지적장애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같은 기간 호르몬 치료제를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기는 “치명적인 헛발질” 또한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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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수술이 젊음을 되살린다는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의 주장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던 시절 정관수술을 받기 전과 이후의 72살 노인 모습.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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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자 교수인 루이스 버먼은 호르몬으로 폭력 성향이 있는 범죄자를 식별하거나 치유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상적인 인간들로 가득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했다. 두통, 변비, 뇌전증, 결핵, 콜레라 등 무려 116가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며 약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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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데일리뉴스>에 실린 살인범 리처드 로엡의 골상학 다이어그램.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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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는 “정관수술을 하면 진액이 배출되지 않고 몸속에 신속히 축적된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했다. 그가 제안한 ‘회춘요법’은 1920년대부터 20여년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슈타이나흐하다’는 ‘회춘용 정관수술을 집도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예이츠도 슈타이나흐했다.” 이를 계기로 호르몬에 기반을 둔 갱년기 치료제 시장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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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뉴욕 출신의 남자 군인이었던 크리스틴 요르겐센은 외과수술과 호르몬의 도움으로 여성으로 성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1953년 11월4일 크리스틴 요르겐센이 수영복을 입고 처음 촬영한 사진. 동녘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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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지난 100여년간 호르몬 연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망하면서 우리가 몰랐던 호르몬의 ‘진짜 얼굴’을 찬찬히 드러낸다. 호르몬에 대한 흔한 편견과 오해를 걷어내고 남성중심적인 연구환경에서 오독된 연구결과를 바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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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호르몬>의 저자인 랜디 허터 엡스타인은 의사이자 의학 전문 작가로, 예일대학교 의대와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대학원에서 강연하면서 각종 매체에 의학 관련 기사를 쓰고 있다. ⓒNina Subin, 동녘 사이언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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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호르몬 연구의 흐름과 성과를 생생하게 전하는 한편 실생활의 소소한 궁금증도 풀어준다. “우리 몸의 신진대사, 행동, 수면, 기분변화, 면역, 젠더, 섹스를 관장하는 화학물질”인 호르몬을 연구하는 것은 “살며 호흡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인 인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크레이지 호르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호르몬의 세계로 스르르 빠져들게 하는 친절하고 유쾌한 안내서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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