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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6 06:01 수정 : 2019.04.26 19:54

[책과 생각] 한 장면

아이스크림 기계가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 우리는 얼리지 않은 오렌지 주스를 그릇에 붓고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냉동해두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마득하게 잊었다가 가까스로 기억해낼 즈음에는 이미 주스가 꽝꽝 얼어 있었다. 우리는 개의치 않고 이탈리아에서 즐겨 먹는 젤라토 스타일로 얼어붙은 주스를 포슬포슬하게 긁어냈는데, 작은 나무 스푼이 입술에 닿는 건조한 느낌만 없을 뿐 그 맛은 젤라토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열두 가지 레시피-집 떠나는 아이에게 전하는 가족의 식탁
칼 피터넬 지음, 구계원 옮김/이봄·2만5000원

독립한 지 한참 지났지만 집에서 즐겨 먹던 음식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요리법을 설명해달라고 해본 경험이 있는지? 실제로 이 책의 모티프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집을 떠나게 된 피터넬의 큰아들 헨더슨이 아버지에게 수도 없이 걸어댄 장거리 전화였다. 칼은 아들과 통화를 나누며 아이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적인 삶의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기본적인 요리 몇 종류와 소스 몇 가지를 조리하는 방법 말이다. (출판사 책 소개 중)

냄비에 5㎝ 깊이로 물을 붓고 끓인다. 끓는 물에 좀 더 수월하게 넣으려면 컵이나 작은 그릇에 달걀을 깨놓는다. 물에 소금이나 레드와인 식초 또는 화이트와인 식초를 1작은술 넣어 간을 맞춘다. 계란을 조심스럽게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 불을 끈다. 5분이 지난 후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 큰 스푼으로 달걀을 꺼낸다. 나는 흰자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노른자는 적당히 꾸덕꾸덕하면서도 속은 액체 상태인 수란을 선호해 5분간 끓이는데, 만약 미감이 섬세하고 과감하고 용감하고 개성이 강한 편이라면 수란을 4분간 익힌 후 부드러운 흰자를 후루룩 마시도록! 사진 이봄 제공

최고급 품질의 싱싱한 양상추와 채소에 드레싱을 잘못 뿌리면 형편없이 망가져버리지만, 약간 시들거나 평범한 채소에 잘 만든 드레싱을 뿌리면 구세주까지는 몰라도 생명줄 하나쯤은 잡을 수 있게 된다. 사진 이봄 제공

토마토가 제철이라 통조림 대신 잘 익은 토마토를 사용할 경우에는 몇가지 방법을 쓸 수 있다. (…) 파스타 냄비에 물을 끓이고 조심스럽게 토마토를 넣는다. 약 30초 후에 껍질이 물렁해지면 토마토를 꺼낸 다음 얼음물에 담그거나 그냥 찬 수돗물로 헹군다. 과도로 녹색 꼭지 부분을 떼어내고 껍질을 벗겨 낸다. 껍질이 너무 단단하게 붙어 있으면 토마토를 다시 한번 냄비의 끓는 물에 넣어 몇 초 정도 더 데친다. 사진 이봄 제공

속을 채워 굽는 토마토로 가장 적합한 것은 레몬 정도의 작은 크기에 하나씩 서빙할 수 있는 얼리 걸이라는 품종인데, 다른 품종들도 가능하다. (…) 토마토를 접시 위에서 거꾸로 들고 꾹 짜서 씨와 약간의 즙을 빼낸다. 토마토에 소금을 살짝 뿌리고 살사 베르데를 한 스푼 얹는다. 파슬리와 마늘로 만든 간단한 살사를 사용해도 기가 막히지만 마저럼, 오레가노, 바질 등의 다른 신선한 허브도 잘 어울린다. 케이퍼와 올리브를 넣어도 근사한 맛을 낸다. 나는 속을 보다 든든하게 채우기 위해 빵가루를 조금 넣기도 한다. 사진 이봄 제공

커다란 그릇에 찬물을 가득 담고 파슬리를 다발째 물에 담근 후 힘차게 이리저리 휘젓는다. 파슬리 다발을 건져올리고 살짝 물기를 털어낸 다음 최대한 바닥에 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얼른 밖으로 나간다. 밖에서 신나게 줄기를 잡고 흔드는데, 채찍처럼 휙휙 휘두르면서 보도와 마당, 강아지 그리고 온 세상에 물방울을 흩뿌린다. 사진 이봄 제공

“케이크요, 아빠. 우리 그냥 케이크만 먹으면 안 되나요?” 어느 해 생일날, 리엄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배부른 요청을 했다. “당근 케이크 말고, 업사이드-다운 케이크 말고, 똑바로 굽는 평범한 그냥 케이크 말이에요.” “물론 되고말고.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좀 힘들긴 하지.” 사진 이봄 제공

일단 생일을 맞은 사람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거나,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샤워를 하고 오라고 제안하자. 당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충분히 준비를 마치고 케이크를 오븐 안에 넣을 수 있다. (…) 여기서 한 가지 경고해두자면 이 케이크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 독립할 생각을 하지 않고 부모님 집에 눌어붙어 있는 자식과도 같다. 케이크 팬 속에서 태어나며, 아무리 말끔하게 분리될 것같이 보여도 팬에서 떼어내려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사진 이봄 제공

내게는 집에서 가족, 친구들과 요리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휴식이다. 나뿐만이 아니다. 나처럼 본능적, 습관적으로 집에서 요리를 하는 셰프들도 적지 않다. 우리는 업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서빙하면서 벌어지는 모든 드라마를 사랑하지만, 살가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집에서 하는 요리의 따뜻함도 그에 못지않게 사랑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식자재를 모으고, 요리를 하고,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하는 그 어떤 행위보다 심오하며 즐겁다. 사진 이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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