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31 06:00
수정 : 2019.05.31 20:03
기억의 습지이혜경 지음/현대문학·1만1200원
이혜경(
사진)의 중편소설 <기억의 습지>는 세 남녀의 이야기다. 상처한 뒤 연고가 없는 시골 마을로 낙향해 홀로 사는 필성과 어느날부턴가 외딴 산자락 빈집에 살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고 겉도는 ‘김’, 그리고 이 마을 노총각에게 시집 온 베트남 여성 응웬이 그들이다. 세 주인공이 한 공간에 모이게 된 것은 말하자면 우연인데, 그 우연의 배후에는 역사와 시대의 아픔이 자리잡고 있다.
“슈우욱, 쇳소리가 귓전을 스치더니, 그의 바로 앞에서 걷던 방 병장이 풀썩 쓰러졌다. 오싹하면서 머리털이 쭈뼛했다. (…) 방 병장의 철모 아래, 귀 위쪽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아래로 흘러 진창의 흙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필성은 전장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지금도 꿈에서 다시 만나며 고통받는다. 베트남 새댁 응웬의 출현에 그는 오래도록 잊었던 베트남말을 다시 공부하며 새댁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그러기에는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역사적 상처가 너무도 크고 깊다.
“칼을 들고 사내의 뒤로 가서 목을 감고 찔렀다. 허억, 생명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생명이 빠져나간 몸은 무거워졌다. 땅을 파고 묻었다. 소주라도 부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사치였다.”
영문 모르고 북파 공작원 부대에 끌려가 의미 없는 살생을 저지르던 청년 ‘김’은 결국 탈영을 선택했고 평생 음지를 전전하던 끝에 늙은 부랑자가 되어 소설 배경인 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어릴 적, 그곳에 한국군이 들어왔다. (…) 이번에도 무슨 선물을 줄까 기대하며 모인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은 총탄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아버지는 겨우 달아났다. 그래도 다리에 총을 맞아, 평생 절뚝였다.”
서투른 베트남말로나마 도움을 주던 필성이 제 조부모가 학살된 퐁니에 주둔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응웬은 필성을 멀리하게 되고, 결국 어이없는 죽음을 맞기에 이른다. “이건 보복이야. 외국인인 그녀를 받아들인 나라, 정작 그 나라를 위해서 몸 바친 자기를, 자기들을 내친 나라에 대한 보복”이라는 ‘김’의 뒤틀린 복수심은 가해와 피해가 뒤섞이고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역사의 불구가 빚어낸 사생아라 해야 할 것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현대문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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