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5.31 06:00 수정 : 2019.05.31 20:04

‘들뢰즈 이후’ 철학 주도 마누엘 데란다
들뢰즈·가타리 실천철학 핵심 배치이론
사회과학으로 확장해 현실문제에 적용
인적 네트워크·조직·정부·도시·국가 분석

새로운 사회철학-배치 이론과 사회적 복합성
마누엘 데란다 지음, 김영범 옮김/그린비·1만9000원

들뢰즈와 가타리가 1980년에 출간한 <천의 고원>은 오늘날 지적-문화적 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발간된 지 이제 40년 가까이 되지만, 이 저작은 여전히 현재의 사상과 문화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텍스트이다.

하나의 이론/사유에서 가장 기초적인 측면은 그것이 전제하는 ‘대상’일 것이다. 분자생물학은 생명체들을 구성하는 미시적인 물질들을 대상으로 한다. 열역학 등 여러 물리과학들은 ‘계=시스템’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한다. 사회학은 개인의 심리나 다른 어떤 것들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라는 보편자를 대상으로 한다. 의학의 기본 대상은 개인일 수도 있고 다른 것들일 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병이다. 그리고 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는 만만치 않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한 사유가 출발점으로 삼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 구체적으로는 그 대상이 함축하는 존재론적 분절을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

프랑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가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은 오늘날 지적-문화적 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발간된 지 이제 40년 가까이 되지만, 이 저작은 여전히 현재의 사상과 문화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텍스트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출간된 지 4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오늘날의 사유와 실천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걸작 <천의 고원>의 ‘대상’은 무엇일까? 이 저작은 도대체 무엇을 다루는 저작일까? 이 저작을 이해하는 일차적인 관건은 이 저작이 다루는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이 저작이 다루는 것은 개체들(카이사르, 칭기즈칸 등)도 어떤 물질적 존재들(세포, 분자, 원자 등)도 보편자들(가족, 국가 등)도 아니다. 이 저작은 ‘배치’를 다룬다. 배치라는 개념은 ‘다양체’라는 개념의 한 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의 ‘이데아’, 라이프니츠 철학에서의 ‘모나드’와 같은 위상을 가진 들뢰즈 철학의 개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가능하겠지만, ‘다양체’ 개념을 빼놓을 수는 없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배치’는 들뢰즈가 가타리와 만나 전개한 실천철학의 핵심 개념이며, 바로 다양체 개념의 실천철학적 판본이다. 존재론에서 다양체를 사유했던 들뢰즈는 가타리와 만나 배치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실천철학적 지향을 “다양체들을 창조하라”라는 말로 정식화했거니와, 이는 곧 “배치들을 창조하라”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한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와 같은 표어에 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실천철학의 표어는 바로 “새로운 배치를 창조하라!”다.

배치란 무엇인가? 배치는 사건이다. 그것은 구조론적으로는 선들로 되어 있고, 생성론적으로는 속도들로 되어 있는 사건이다. 강의는 강사·학생들의 선, 칠판·백묵·지우개 등의 선, 이런 여러 선들로 되어 있고, 강사의 강의 속도, 학생들의 반응 속도 등 여러 속도들로 되어 있다. 야구경기는 선수들·심판들·관중 등의 선, 글러브·공·배트 등의 선을 비롯해 여러 선들로 되어 있고, 공격의 속도, 관중이 가감되는 속도, 공이 움직이는 속도 등으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와 생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건들(강의, 야구경기, 전시, 시위, 학회…)이 배치들이다. ‘agencement’은 흔히 영어로 ‘assemblage’, 한국어와 일본어로는 ‘배치’로 번역되는데, 이 번역어들이 공간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에 자칫 ‘agencement’이 사건이라는 점을 가릴 수 있다. 그러나 배치는 사건 이외의 것이 아니다.

마누엘 데란다는 멕시코 출신 철학자로 현재 스위스 유럽대학원에서 현대철학과 과학을 가르치며, 미국 프린스턴대학 건축학과 조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언어학, 경제학, 군사학, 진화론, 카오스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글을 쓰는 저술가이기도 하다. 유럽대학원 누리집 갈무리
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이해에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이며, 이들을 이어 행하는 자신의 작업들 역시 의미 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내가 기획위원으로 있는 ‘리좀 총서’에서는 그의 저작을 꾸준히 번역해낼 예정이다. 이번에 번역된 그의 <새로운 사회철학>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이론을 사회과학의 지평으로 확장하고,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응용한다. 이전에 번역된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이 들뢰즈 존재론을 자연과학과 연계시켜 수준 높게 해설해 주고 있다면, 이번의 이 저작은 <천의 고원>을 사회과학과 연계시켜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데란다는 1장과 2장에서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까지 이어진 본질주의 철학, 총체성의 철학과 배치 이론이 어떻게 존재론적 핵심을 달리하는가를 해명한다. 아울러 현대의 여러 사회과학 이론이 기반하는 존재론적 토대를 검토하면서, 배치 이론을 사회과학적 맥락에 위치 짓는다. 이런 이론적 작업을 깔고서, 3~5장에서는 인적 네트워크, 조직, 정부, 도시, 국가 등을 배치 이론을 활용해 분석한다. 그중에서도 도시를 다룬 부분은 특히 흥미로워 보인다. 발터 베냐민의 파사주론과 스타일상 매우 거리가 멀지만, 서로 비교해 볼 만한 여러 논점을 담고 있다.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