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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2 18:18 수정 : 2005.12.23 15:07

김찬호/한양대 강의교수·문화인류학과

신분사회에선 만민평등 전파 산업화 시기 공동체 보금자리 아이들엔 즐거움 주는 대안학교 문화산업 발달하면서 역할 퇴조 예배가 이벤트로 변하고 있다 진정 낮은 곳으로 깃들 성탄의 밤을 위하여 노∼엘 노∼엘

생활속의 문화사회학

‘세상 어둠이 아무리 깊다 해도 / 마침내 별이 되어 오신 예수여 /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 자체로 / 사랑의 시가 되신 아기여 / 살아 있는 우리 모두 맑은 마음으로 / 겸손하게 내려앉기를 / 서로 먼저 사랑하는 일에만 깨어 있기를 / 침묵으로 외치는 작은 예수여’ (이해인 ‘성탄 기도’)

예수가 세상에 온 지 2000년. 이제 지구촌 구석구석에 교회가 세워져 있고 거의 모든 나라가 서기력을 따를 만큼 기독교는 보편적인 문화 기반이 된 듯하다. 그러나 최근 어느 조사에 따르면 십자가는 생각만큼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보다는 맥도날드의 아치, 셸 석유회사 로고, 올림픽 오륜 등이 훨씬 친근하다고 한다.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들에서조차 십자가는 교회에서보다 텔레비전에서 여배우나 모델들의 목걸이를 통해 더욱 익숙한 실정이다. 그에 비해 한국은 기독교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의 야경을 장식하는 붉은 십자가의 군락은 세계 어느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관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급성장한 한국의 기독교는 엄청난 문화혁명을 수반했다. 신분질서가 엄존했던 시대에 모두가 신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만나는 교회, 남녀노소가 한 장소에서 함께 드리는 제사(예배)는 획기적인 경험이었으리라. 또한 해방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교회는 도시의 외롭고 고단한 심령들이 어울리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에 대해 교회가 값싼 위로를 주면서 교세를 확장한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주화 운동에서도 일부 교회는 국가의 부당한 힘에 맞서는 보루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 치외 법권으로서 재야 투사들의 집결지가 되어주었던 명동성당은 최근까지도 각종 시위와 농성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양에서 중세의 수도원은 순례자들의 숙소, 학교, 병원, 자선 기관 등 매우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 직후 수많은 고아들을 거두어들인 곳이 교회 및 관련 단체들이며,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구제와 봉사에 힘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는 문화적 차원에서도 크게 기여했다. 웬만한 한국인들이면 어린 시절 성탄절에 교회에 한두 번쯤 가보았을 텐데, 그것은 단지 과자를 주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트리와 화려한 캐럴의 분위기 속에 벌어지는 성극과 성가대 공연은 문화가 궁핍했던 이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한 해에 한 두 번 씩 예술제와 수련회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청소년들에게 교회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배양하는 대안학교였다.

그러나 미디어와 문화산업이 발달하면서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의 발길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교회들은 또 다른 문화의 혁신을 통해 젊은이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사회학도 강은령 씨는 금년 연세대에 제출한 석사 논문 <대형교회의 문화공간화와 청년 공동체에 관한 연구>에서 그 전말을 소상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예배 형식의 변화다. 80년대 후반 온누리 교회에서 시작된 ‘(두란노) 경배와 찬양’은 여러 선교단체에서 유행하다가 이제 청년 예배의 기본 형식으로 정착했다. 그 예배에서는 싱어들이 앞에서 발랄한 몸짓으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돋운다. 찬송가 대신 불리는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은 누가 들어 보아도 대중음악과 거의 똑같은 색채를 띠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연출 능력이 교회의 규모와 재정 여건에 달려 있음을 치밀하게 분석한다. 예배가 멀티미디어 쇼의 성격이 짙어지는 흐름 속에서, 영상과 음향과 노래하는 사람들의 실력 등에서 어설픈 구석이 보이면 ‘은혜’가 반감된다. 그 이벤트는 인원이 많을수록 전문화된 달란트들을 골고루 활용할 수 있고, 재정이 풍부할수록 고급 장비로 매혹적인 무대를 꾸밀 수 있다. 그리고 요즘에는 청년들이 각종 소그룹 별로 친밀하게 사귀고 활동을 나누는데, 그 공동체를 위해 고급 카페 같은 사랑방을 별도로 마련 한다. 문제는 그런 문화적 투자를 할 수 있는 교회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그것이 가능한 대형 교회에 점점 청년들이 몰리는 반면, 작은 교회들은 ‘인적 자원’을 계속 빼앗기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수많은 붉은 십자가들이 거의 다 그러한 빈곤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영세한 교회의 것임을 생각하면 도시의 야경이 새삼 처연하게 다가온다. 그 작은 교회들에서 부르는 찬송은 희미하고 초라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미천함이 예수가 거한 삶의 자리였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규모와 물량으로 엔터테인먼트의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겸허하게 복음을 실천하는 성직자와 신도들이 있다. 가난한 동네에서 또는 외국인 노동자 들을 위하여 커뮤니티 센터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교회들이 있다. 음지의 이웃들을 묵묵히 섬기는 그들이 현장에서 경험하는 사건들은 현란한 예배 보다 한결 은총 충만한 ‘이벤트’일 것이다. 그렇게 낮은 곳으로 임재하는 평강의 빛으로 성탄의 밤은 고요하고 거룩하다.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마지막 장면이 사뭇 충격적이었다. 예배실 강단 옆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하나 세워 놓았는데, 다름 아닌 앙상하게 죽어 있는 나무 한 그루였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기를 소망하는 상징이란다. 평범한 고목 이 그토록 황홀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삶과 죽음의 초월을 암시하는 그 오브제는 보는 사람들의 남루한 영혼을 전율시킨다. 바로 그러한 존재의 역설적 신비를 축하하는 것이 성탄의 노래가 아닐까. 척박한 땅에 샤론의 꽃 한 송이로 육화한 그리스도, 응달에 깃드는 따스한 기별을 위하여 우리 모두 노엘, 노-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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