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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2 18:37 수정 : 2005.12.23 15:07

역사로 보는 한주

1991년 12월25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이 독립해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평의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등장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즉 소련은 그렇게 사라졌다. 70여년에 걸친 20세기 최대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중세 교회의 절대적 권세와 이념의 색다른 버전과 같았던 스탈린식 일당독재체제하의 전체주의사회가 몇 세대에 걸쳐 양성한, 만사에 자발적이어야 할 ‘사회주의적 인간’과 생산양식은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았다. 중앙의 통제력이 사라진 순간부터 소비에트는 이기적 생존투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현존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냉전의 승자’가 대안이었던가.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자본주의사회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은 그 끝간 데를 알 수 없다. 자본주의 무한경쟁체제는 생산력에서 압승했으나 필연적으로 다수대중을 그 혜택에서 소외시킴으로써 자멸을 예고하고 있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것은 소련 붕괴의 서곡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기치 아래 그는 “노동자에서 장관과 중앙위원회 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변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만큼 소련은 정치·경제적으로 이미 구제불능 상태였다. 그의 등장은 소련 재생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는 검열을 폐지하고 해외이민을 자유화했으며, 일당체제를 포기하고 자유선거를 보장했다. 될수록 적게 일하고 가능한 한 많이 분배받으려는, 결국엔 아무도 일하지 않는 경제체제를 뜯어고치고 일방적으로 대규모 군비축소를 강행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군을 철수시켰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과 발트3국을 해방시켰다. 탈냉전이 본격화하고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한국은 소련과 수교했다.

91년 8월 이런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한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회주의 강성대국’의 향수에 불타던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와 국방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등이 흑해 크리미아반도에서 휴양 중이던 고르바초프 일가를 연금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보수파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났다. 그 두달 전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보리스 옐친 주위에 모여든 시민의 항전은 탱크를 앞세운 쿠데타군을 무력화시켰다. 중앙배급체제의 붕괴로 상점이 텅텅 비고 빵과 고기조차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어도 한번 열어젖힌 세계로 나간 다수대중은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쿠데타는 저지되고 보수파는 당분간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됐으나 고르바초프 체제 역시 치명타를 입었다. 그의 몰락은 곧 소련의 몰락이요 해체였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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