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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2 19:55 수정 : 2005.12.23 15:10

소리의 자본주의-전화, 라디오, 축음기의 사회사
요시미 슌야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펴냄. 1만8000원

전화·라디오·축음기등 음향미디어 수용사
본디 상호 송수신용이었던 라디오는
산업화되면서 일방통행 매스미디어로 변신
히틀러의 나치국가 형성에도 큰영향 줘
19C 말에는 전화로 공연·스포츠등 중계

텔레비전에 혹사당한 자에게 라디오는 복음이다. 라디오는 귀만 빌려주면 그만이다. 엄청난 정보량의 시각 이미지에서 자유로운 뇌는 여분의 용량을 스스로 생각하는데 할애할 수 있다. 그래서일 거다. 금세 소멸할 것 같았던 라디오가 일정한 청취자층을 갖고 있는 것은…. 오히려 텔레비전에서 못하는 여론형성에 이바지하는 것은…. 최근 개국한 소규모 출력의 마을 라디오방송국은 일방통행 일색 환경에서 쌍방향 미디어 회생실험을 한다.

<소리의 자본주의-전화, 라디오, 축음기의 사회사>(이매진 펴냄)는 소리를 매개로 하는 전화, 라디오, 축음기 등 음향미디어가 어떻게 형성되고 수용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세 가지를 운위하지만 전화나 축음기는 라디오로 수렴되는 모양새다.

루스벨트는 라디오로 이미지 조작

“확성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독일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말이다. 방송국 요직을 나치계 인물로 교체한 그는 45차례 독점 선거방송을 통해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나아가 값싸고 통일된 규격의 수신기를 대량 보급해 독일 국민의 귀를 일상적으로 자신의 목소리에 종속시켜 나갔다. 그 무렵 미국 상황도 비슷했다.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라디오를 이용해 국민들의 사로잡았다. 라디오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십분 활용하여 ‘노변담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거실에 앉아 이웃에게 솔직하고 정중하게 말하는 남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했다.

히틀러의 나치국가, 루스벨트의 뉴딜국가처럼 국민국가의 재편은 라디오 즉, 아마추어 무선국을 재편하여 산업화한 것과 맞물려 있다. 활자로 말미암은 인쇄물의 대량보급에서 시작된 국민국가는 라디오의 산업화로 완벽한 형태가 되었다는 평가다.

‘라디오’은 본디 상호 송수신이 가능한 음성무선통신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처럼 일방통행의 매스미디어가 아니었다. 아마추어 무선가들의 네트워크는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912년 미국에는 122개의 라디오 클럽이 있어 전파미팅이 활발했다. 이 클럽들은 서로를 연결하여 광역망도 만들어 나갔다. 1차대전 이후 전쟁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이 가세하면서 라디오망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지금의 라디오 방송국이라 할 만한 것이 시작된 것은 1920년 ‘KDKA국’.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방송을 시작으로 후버 대통령의 담화, 교회의 미사, 경기중계, 뉴스나 강연 등을 방송했다. KDKA가 무선 라디오국과 다른 점은 정시방송을 한 것, 산업활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이어 전기기구 회사, 백화점, 신문사 등이 차례로 방송국을 설립했다. 이들 지역미디어는 컨트리음악, 권투나 야구 등 프로스포츠를 중계하는 전국미디어로 발돋움하는데 여기에는 더 넓은 시장을 찾아 라디오를 유력한 광고매체로 여기게 된 기업들의 광고가 뒷받침되었다.

라디오는 마르코니(1874~1937)에서 시작된 무선전신에서 진화한 무선전화. 페선던(1866~1932)이라는 자가 교류 발전기를 고속 회전시켜 만든 고주파에 음성신호를 실어 보내면서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는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유선전신을 보완하는 것으로 여겼듯이 무선전화를 무선전화의 보완쯤으로 여겼다. 음성무선기술이 라디오방송으로 탈바꿈하는데는 상상력의 도약이 필요했다. 포레스트(1873~1961)는 1907년께 에펠탑을 송전탑으로 방송이벤트를 하는 등 분투했으나 너무 일러 곧 사업을 접고 말았다.

전화 자동교환기 도입 이전의 유선전화는 교환수가 있어 가입자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또 가입자가 번호로 기호화 하기 전에는 이름과 주소로 구별되어 교환수는 가입자와 인격적인 관계였다. 사진은 옛 서울중앙전화국 시외전화교환실.
전화 교환수는 맞춤형 뉴스캐스터

유선전화는 어떤가. 미국의 웨스턴유니언전기회사와 영국 체신청은 봉을 놓쳤다. 벨과 동업자가 전화에 대한 모든 권리를 10만달러에 사라는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 이 음성전달 장치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리라고 예측 못했다. 당시는 모스부호 기반의 전신 시스템이 통신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화는 애초 사업수단이었지 먼 거리의 친구나 가족과 잡담하는 미디어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인사는 고사하고 1920년대까지 전화로 잡담하는 것은 전화의 본래 이용법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짓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화는 1880년대 이후 오락 미디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1890년 파리 전화회사가 계약자에게 극장의 공연실황을 중계했고 세기 말에는 전화 미사는 물론 선거운동, 선거 관련 속보 등이 중계됐다. 가장 유선방송스런 형태는 부다페스트의 텔레폰 힐몬트. 1893년부터 20여년 동안 전화로 정치·경제, 스포츠, 강연·연극·음악회, 낭독 등을 고객에게 서비스했다. 가입자가 증가할수록 설비공사에 많은 돈이 들어 파산하고 말았지만….

초창기 북미 농촌지역은 공동전화여서, 여러 세대의 송수화기가 회선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일하면서 수화기를 내로놓고 이웃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었고 대화에 끼어들기도 했다. 유선라디오의 원시형태. 요즘처럼 비밀을 전제로 한 폐쇄 미디어로 변한 것은 도시 기반의 전화망이 농촌의 것을 흡수하고, 전화 교환수들의 구실이 규격화되고, 전화산업이 가입자들의 잡담을 산업화하면서부터. 그때까지 전화 교환수들은 지역의 네트워커였다. 북미에서는 1883년까지 가입자들에게 전화번호가 부여되지 않아 교환수가 지역의 모든 계약자의 이름과 주소를 외워야 했다. 계약자와 교환수의 관계는 단골관계. 교환수들은 매일 아침 고객을 호출해 회선 점검 겸 아침인사를 했고 다양한 지역정보를 전해줬다. 맞춤형 뉴스캐스터였던 셈.

회복해야할 매스미디어 원형 보여줘

끝으로 축음기. 한장의 금속 원반으로 레코드를 찍어내기 이전, 원통형은 1회 연주에 10개 밖에 기록할 수 없어 밴드는 판매용 녹음을 위해 몇시간이고 같은 곡을 연주해야 했다.

소리미디어의 발전사를 돌이켜 알게 되는 몇 가지 사실. 곁가지로 파생한 것이 되레 주류미디어로 성장했다는 것과, 대체 수단이 생기면서 소멸할 것 같은 전단계의 것이 나름의 자리를 잡아 공생한다는 것. 무엇보다 이 책의 진가는 회복해야 할 매스미디어의 원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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