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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영역을 개척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오늘날에 이르러 비과학적 논리와 방법 탓에 종종 과학의 비판을 받지만 인문학에선 옹호되기도 한다. 꿈의 해석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사진은 기억, 종교, 유머와 환상의 작품세계를 펼친 마르크 샤갈의 1939년 작 <한 여름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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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미래 아닌 과거를 알려준다 꿈은 억눌린 소원의 성취다 꿈은 억압된 성적 욕망의 발현이다 꿈은 무의식이다
고전 다시읽기/프로이트 ‘꿈의 해석’ 1. 이런 가상법정을 상상해보자. 평소 국가 안전을 기획하는 데 온힘을 기울여온 황제가 신하들의 핸드폰을 도청했다. 어느 날 충복 중에 충복으로 알려진 신하가 대역죄로 붙잡혀 왔다. 입이 방정이지, 자기가 전날 밤에 황제 죽이는 꿈을 꾸어 마음이 몹시 심란하다는 말을 가까운 벗에게 해버렸던 것이다. 요즘으로 하면 검찰 같은 곳에서 즉각 사형에 처하려 했다. 그러자 법무부 장관쯤 되는 이가 훗날 과거사청산위원회 같은 곳에서 ‘사법살인’이라 몰아 부칠 가능성이 있으니, 재판은 하고 보자며 ‘지휘권’을 발동했다. 그리하여 재판이 열리고 세인의 이목을 끄는 증인으로 프로이트가 초청되었다고 말이다. 용한 점쟁이들은 한결같이 꿈은 본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므로 신하를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증언했다. 프로이트는 냉소를 머금은 채 반대심문에 응했다. 저 신하는 죄가 없소이다, 라고. 순간 법정은 소란스러워지고 장내를 겨우 정리한 재판관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 하니,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과연 꿈의 가치는 미래를 알려주는 데 있는가? 물론 그렇다고는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대신 꿈은 과거를 알려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그러자 자존심 상한 점쟁이들이 들고 일어나고 재판에 지면 황제에게 찍힐 것을 염려한 검사가 반론을 폈다. 막히면 에둘러 가야 하는 법, 프로이트가 뜬금없이 이런 저런 꿈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아래와 같다. 자신의 명저 <꿈의 해석>에 나온 내용이라는 토를 확실히 달면서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유행어 유포프로이트가 이웃사촌과 함께 소풍을 간 적이 있다. 프로이트에게는 여덟살 난 딸아이가 있었고, 이웃집에는 에밀이라는 열두살짜리 아들을 두었다. 다음날 딸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있잖아요, 아빠, 에밀이 우리가족이 된 꿈을 꾸었어요. 에밀은 우리처럼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서 커다란 방에서 우리와 함께 잤어요. 그런데 엄마가 방에 들어와 파란색과 초록색 종이로 싼 커다란 초콜릿 한 움큼을 우리 침대 밑으로 던져주었어요.” 전날 기차역에서 아이들이 초콜릿 자동판매기를 보고 사달라고 졸랐지만, 엄마가 사주지 않았다. 그래서 꿈에 초콜릿이 등장한 것. 딸은 굳이 한형제가 되지 않더라도 다른 남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녀석과 가족이 되는 꿈을 꾼 것. “꿈은 소원성취”라는 것이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봐라, 자기들 말이 맞잖은가. 저 신하는 의당 황제를 죽이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한 여인의 다른 꿈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언니는 일찌감치 큰 아들을 잃었다. 그는 실제로 큰조카를 도맡아 키우다시피했다. 그런데 꿈에 둘째조카가 죽어서 자기 옆에 있는 것이 아닌가. 큰조카가 죽었을 때 펼쳐졌던 장면과 너무 똑같았다. 프로이트, 이름난 점쟁이와 검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언니의 남은 자식마저 죽기를 바라는 악녀였다는 것이요? 아니면 큰조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둘째가 죽었으면 차라리 나을 뻔했다고 소망했던 것이요?” 썰렁해진 장내를 훑어본 프로이트, 자기가 던진 질문에 답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언니집에 들락거리던 한 남자와 눈이 맞은 적이 있었다. 작가이면서 교수였는데, 언니가 나서서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연심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꿈꾸기 바로 전날 그이가 한 연주회에 들린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프로이트가 물었단다. 큰 조카아이가 죽었을 때 그이가 왔었냐고. 답은 예상한대로였다. 그에게 한 말을 프로이트가 인용했으니 이러했다. “이제 또다른 조카애가 죽는다면, 그때와 같은 일이 되풀이될 겁니다. 당신은 언니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틀림없이 교수는 문상하기 위해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당신은 그때와 똑같은 상황에서 그를 만나게 되겠지요. 꿈의 의미는 당신이 마음속에 억누르려고 애쓰는 재회의 소원입니다.” 그리고나서 힘주어 말했다.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다.” 한참 어리벙벙해 하던 점쟁이 가운데 하나가 정신 차리고 반격에 나섰다. 당신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저 신하는 곧 일어날 황제 살해의 기쁨을 며칠 앞당겨 꿈속에서 느꼈으니, 유죄라고 말이다. 싱겁게 끝날 것 같던 재판이 다시 균형을 잡았다. 이에 질세라 프로이트가 들려준 세 번째 이야기는 비스마르크가 기록에 남긴 꿈이다. 과학은 프로이트 추방 그가 알프스의 좁은 산길에서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었다. 오른쪽은 낭떠러지였고 왼쪽은 암벽투성이였다. 길이 갈수록 좁아졌고, 말은 나아가기를 꺼려했다. 길이 너무 좁아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말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그는 왼손에 든 채찍으로 매끄러운 암벽을 치면서 하느님을 불렀다. 채찍이 한없이 길어지며, 암벽이 무대 배경처럼 무너져 내리고 넓은 길이 열렸다. 그 길을 통해 보헤미아의 구릉과 삼림, 깃발을 든 프로이센 군대가 보였다. 이 꿈은 프로이센의 내부갈등에서 벗어나고 오스트리아와 벌인 싸움에서 이기를 바라는 비스마르크의 소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 꿈에는 또다른 뜻이 스며 있다는 것이다. 말채찍은 ‘자지’의 상징이다. 그것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은 유아기적인 리비도 과잉집중을 뜻한다. 채찍을 손에 든 것은 자위행위를 넌지시 이르고 있다. 하느님을 부르며 암벽을 치는 행위는 모세를 생각나게 한다. 여기에서는 복합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지도자 일반이 겪는 고충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숨은 뜻이 있다. 건드리지 말라는 지팡이를 잡고 두드려 액체를 만들어낸 모세에 빗대어 아동기 자위행위를 떠올린 것이다. 한 호흡 쉰 프로이트, 결정타를 날리는 발언을 한다. “아동기 이후 무수히 많은 성분을 가진 성충동만큼 많은 억압을 받은 충동은 아무것도 없으며, 또한 그렇게 많은 강한 무의식적 소원을 남긴 충동도 없다. 이 소원들은 이제 수면상태에서 꿈을 만들어낸다. 꿈-해석에서 성적 콤플렉스의 이런 의미를 결코 잊어서는 안되지만, 물론 그렇다고 오로지 그것만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도 안된다.” 충격에 휩싸인 방청객을 대상으로 프로이트는 부모의 죽음을 원한 꿈을 예로 들어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장내는 공황상태에 빠지고, 판사는 선고를 내리기로 결심한다. 황제를 죽이는 꿈을 꾼 신하는 무죄였다. 검사측의 격렬한 항의를 들으며 퇴장하던 판사가 한마디 던진다. 우라노스를 거세한 것이 누구였고, 크로노스를 살해한 것은 누구였나? 2. 두 번째 가상법정을 상상해보자. 이번에 불려온 피고인은 프로이트. 무의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유행어’를 만든 그이를 후대의 학자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 법정은 이미 열렸고, 판결문이 <대담>(도정일·최재천 지음, 2005)이라는 책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학계에서 프로이트 이론은 오래전에 과학의 영역에서 쫓겨나 임상에서도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게 생물학자의 평가다. 이에 대해 한 인문학자는 프로이트이론의 사상사적 가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대꾸했다. 계몽철학자들이 말한 지식과 판단의 주인은 명징한 의식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론으로 이같은 자아에 대한 환상, 그러니까 명징의식의 이데올로기를 뒤짚어 엎어버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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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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