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22 21:28
수정 : 2005.12.2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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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철 소설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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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실험의 작가 최수철(47)씨가 두 권짜리 장편소설 <페스트>(문학과지성사)를 내놓았다.
소설은 ‘무망’이라는 이름의 소도시를 휩쓰는 자살 열병의 전모를 다큐멘터리적으로 추적한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자살방지센터’에서 일하는 ‘시우’를 주인공으로 삼고 시우의 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인물들을 주변에 배치한다. 문제는 시우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이 무망을 위협하는 자살병의 단순 관찰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들 역시 자살병균(=페스트)의 습격 위협에 노출된 하릴없는 희생자이기도 하다. 소설은 중심 인물 시우에게서 먼 데서부터 점차 가까운 쪽으로, 시우와 자살자들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방향으로 진행되다가는 결국 시우 역시 병균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병균’이라고는 했지만, 최수철씨의 소설은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며 여기서 말하는 병균이나 페스트라는 것이 생물학적 엄밀성을 지닌 개념은 아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오랑’시를 찾아온 것이 실제의 페스트였던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최수철씨의 작품에서 페스트는 현대인들이 앓는 사회적·심리적 질병에 해당한다. 현대 사회의 어떤 속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자살 충동에 휩쓸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작중 인물인 작가 ‘임서상’은 자신의 도시가 겪고 있는 자살 열풍에 관해 칼럼을 쓰면서 그 글이 “지구상의 한 도시에 몰아닥친 죽음의 광기에 대한 일종의 연대기이자, 그 광기를 치유하기 위해 씌어지는 임상기록”이라 표현한다. 이 말은 아마도 소설 <페스트>에 대한 최수철씨 자신의 자리매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칼럼 필자인 임서상 자신 종국에는 자살의 광기에 잡아먹힘은 물론이거니와, 작가는 시우와 서상을 비롯해 무망의 시민들이 자살을 향해 행진해 가는 과정을 지치지도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자살과 관련한 동서고금의 일화와 담론 역시 풍부하게 소개된다. 문제는 무망 시민들이 택하는 집단적 자살의 역사적·사회적 연원에 대한 탐구가 희박하다는 데 있다. 정체를 알 수 없이 막강한 위력을 지닌 ‘적’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인력으로 어찌 할 수 없다는 체념은 패배주의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원고지 3천 장이 넘는 역작 앞에 감탄과 함께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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